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237
한자 喪葬禮
영어공식명칭 Funeral Rit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효경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지역에서 사람이 사망한 후 매장에서 탈상할 때까지 치르는 의식.

[개설]

사람이 사망하면 그 시신을 의식에 따라 처리하고 그 영혼도 함께 위무(慰撫)한다. 죽음이 임박하면 안방으로 모시고, 죽음을 확인하고, 시신이 굳기 이전에 반듯하게 수시(收屍)를 하고, 망자를 데리러 오는 저승사자를 위해 사자상(使者喪)을 마련하고, 떠나가는 영혼이 머물기를 바라며 고복(顧復)한다. 사망을 마을과 친족에게 알리는 부고(訃告)를 내면 그 소식을 접한 이들이 문상(問喪)한다. 망자의 가족은 상복(喪服)으로 갈아입고 망자의 영혼과 시신을 위무할 준비를 한다. 모든 채비가 완료되면 절차에 따라 시신을 염습(殮襲)하고 입관(入棺)한다.

입관을 마친 시신은 상여(喪輿)에 옮겨 싣고 장지(葬地)로 운구해 매장한다. 장례를 마친 후에는 망자의 영혼을 여러 절차를 통해 위무한다. 망자의 영혼을 집안 상청에 모시고 초우재, 재우재, 삼우재 등을 지내고, 3개월이 되면 곡(哭)을 멈추는 졸곡제를 지낸다. 망자의 첫 기일(忌日)에는 소상(小祥)을 치르고, 그 이듬해에는 상을 마치는 탈상의 의미로 대상(大祥)을 치른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충청남도 아산시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보편화하면서 전통 방식의 장례 절차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초종(初終)]

까마귀는 흉조(凶兆)를 예견하는 영물로 인식한다. 마을에 까마귀가 울면 초상이 나고, 떼를 지어 다니면 고뿔이 퍼질 징조로, 아침에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언짢게 여긴다. 임종을 앞둔 어른은 성별과 관계없이 안방으로 모신다. 임종 직전에 자손에게 유언을 남기거나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둔다. 부모의 임종을 지킨 자손을 일러 ‘종신자식(終身子息)’이라 부르는데, 임종을 지키는 것을 효(孝)의 덕목 중 하나로 간주한다.

[초혼(招魂)·수세[收屍]·초상집 금기]

사람이 죽으면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된다고 믿는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저승사자가 데려간다고 여긴다.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장례 절차에 해박한 사람이 찾아와서 초혼(招魂)을 하는데, 이는 저승의 염라대왕께 망인의 죽음을 고하는 절차이다. 이를 고복(皐復)이라고도 하지만 초혼이라는 용어를 더욱 많이 사용한다.

초혼을 하려면 망자의 속적삼을 들고 마당 가운데로 나간다. 적삼을 한 손에 쥐고 흔들면서 망자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부르며 ‘복(復)’을 크게 세 번 외친다. 망자의 떠나가는 혼이 이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오도록 한다. 초혼을 마치면 속적삼은 지붕 위에 올려 둔다. 속적삼은 상여 나가는 날 내려서 태운다.

사망하면 곧 시신의 팔다리 등을 구부러진 곳이 없도록 반듯하게 해 두는데, 이를 ‘수세[收屍]를 걷는다’고 한다. 수세를 거둘 때는 홑이불이나 집 안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천으로 시신의 어깨·손·다리·발을 묶는다. 손은 손바닥을 마주하여 묶고, 발은 발끝이 천장을 향하도록 한 후 발목을 묶는다. 그런 후 귀와 코를 솜으로 막아둔다. 수세가 끝나면 칠성판 위로 시신을 옮긴다. 망자는 안방의 아랫목에 모시는데, 이때 머리는 남쪽을 향하도록 하거나 동쪽으로 둔다.

시신을 모신 방에서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특히 망자와 관련한 이야기는 주의해야 하는데, 망자도 산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므로 부정한 이야기를 하면 노해서 벌을 주기 때문이다. 초상집에서는 개, 고양이, 닭 등을 단속한다. 특히 고양이가 시신을 모신 방의 아궁이에 들어가면 시신이 거꾸로 일어선다고 하여 주의한다.

[염습(殮襲)·성복(盛服)·조문(弔問)·상포계(喪布契)]

망자가 돌아간 다음 날에 염습을 한다. 염습을 할 때는 먼저 향나무를 우려낸 물을 솜에 묻혀 시신을 닦는다. 이어 수의를 입히는데 바지 먼저 입히고, 저고리를 입힌다. 부잣집에서는 혼례식에서 입었던 활옷으로 수의를 삼기도 한다. 이때 얼굴에는 간단히 화장을 하고, 손톱과 발톱은 깎아서 주머니에 넣어 시신의 겨드랑이에 둔다. 멱목(幎目)으로 얼굴을 덮기 전에 망자의 입에 쌀을 물리는 반함(飯含)을 하는데, 쌀을 미리 불려 두었다가 버드나무 수저로 망자의 입안에 넣고 동전도 넣는다. 쌀은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동안의 양식으로, "천 석[섬]이요! 만 석이요! 백만 석이요!"라고 하며 넣는다. 동전은 저승에서 사용할 돈이므로 세 조각으로 쪼개어 "천 냥이요! 만 냥이요! 백만 냥이요!"라고 하며 넣는다. 수의를 입히고, 요와 이불로 시신을 감싼다.

염습이 끝나면 영좌(靈座)를 마련한다. 영좌는 마루의 안방 문 옆에 설치하며, 상을 놓고 명정(銘旌)을 걸어 둔다. 망자가 남자이면 ‘학생○○○씨지구(學生○○○氏之柩)’라고 쓰고, 여자이면 ‘유인○○○씨지구(孺人○○○氏之柩)’라고 쓴다. 상주는 상복을 입고, 상장(喪杖)을 짚는다. 어머니상에는 오동나무나 미루나무로 상장을 짚고, 아버지상에는 대나무를 사용한다. 상장은 부모님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항상 조심해서 다루고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발인(發引)·상여(喪輿)·노제(路祭)]

보통 삼일장을 치른다. 발인 전날에 상여를 꾸민 후 빈 상여를 매고 망자와 친분이 있는 집을 다닌다. 이를 ‘빈 상여 을르기’라 한다. 발인 예행 연습으로 요령잡이가 앞장서서 회심곡을 부르면 상여꾼이 발을 맞추어 본다. 빈 상여가 오면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방 안에서 마루로 운구할 때는 상주와 상주의 친구들이 한다. 관을 광목으로 묶어서 네 명이 어깨에 메고 방의 네 귀퉁이를 찧는 시늉을 한다. "톱질이요. 톱질이요" 하고 크게 외치는데, 이것은 망자에게 방 안에서 마당으로 모시겠다고 고하는 것이다. 마루 밑에는 바가지를 놓고 앞선 사람이 밟아 깬다. 이는 모든 액을 막는 의미이다. 망자가 상여에 안치되면 발인제를 지낸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는 상여를 쓰지 못하고, 막대기 두 개 사이에 거적을 연결하여 만든 ‘마주잽이[마주잡이]’로 운구를 했다. 일손이 부족하면 지게로 운구하는데, 이를 ‘지게송장’이라 한다. 아이들 시신뿐 아니라 가난한 집에서는 더러 지게로 시신을 옮겼다.

마을 상여는 보통 열두 명이 메는데, 각 줄에 여섯 명씩 24명이 메기도 한다. 상여 앞에서 목청껏 소리를 하는 ‘소리꾼’은 마을에서도 입담이 좋고, 소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요령을 흔들면서 상엿소리를 한다. 행상(行喪)을 할 때는 공동 우물 옆으로는 지나가지 않는다. 또한 산마루를 넘지 않으며, 마을 중앙 길을 질러서 가지 않는다. 남의 집 뒤로 지나가는 것도 피한다. 장지가 멀면 길에서 ‘노제(路祭)’를 한다.

[치장(治葬)]

땅을 파기 전에 산신제를 지낸다. 집에서 준비해 간 과일과 포를 묏자리보다 약간 위쪽에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다. 제주(祭主)는 시신을 보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 맡는다. 하관은 정해진 하관시(下棺時)에 맞추어서 한다. 하관을 하고 시신 위에 명정을 덮는다. 명정 위에는 홍대를 덮는다. 홍대는 옻칠을 한 작은 판자로 속광중보다 약간 넓은 너비로 다섯 개나 일곱 개를 만들어서 덮는다. 망인의 가슴 부근 홍대는 폐백을 하고 나서 덮는다. 시신의 머리 방향에 맞추어서 일직선으로 막대기를 꽂아서 좌향을 잡는다. 자손들은 봉분이 완성되면 망인의 혼백과 영정 사진을 묘 앞에 두고 성분제(成墳祭)를 지낸다.

[우제(虞祭)·졸곡제(卒哭祭)·소상(小祥)·대상(大喪)·탈상(脫喪)]

망자의 혼백은 탈상하기 이전까지 궤연(几筵)에 모신다. ‘지청’ 혹은 ‘고연’이라 부르며, 대청이나 건넌방에 설치한다. 상주는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지청에 혼백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이를 ‘반우제(返虞祭)’ 또는 ‘초우제(初虞祭)’라 한다. 제물은 주과포(酒果脯)[술·과일·육포] 위주로 간단하게 마련하며, 맏상주가 잔을 붓고 절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지청에서 재우제(再虞祭)를 모시고, 사흘째 되는 날은 삼우제(三虞祭)를 지낸다. 삼우제 날에는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지청에 상식(上食)을 먼저 올리고,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삼우제를 지내는 날에는 가까운 친척들도 참석한다. 삼우제가 끝나면 매일 아침저녁마다 지청에 상식을 올린다. 매번 새로 밥을 지어서 올리고, 찬은 평소에 먹는 음식을 먼저 올린다. 상주는 평소에 논일을 할 때도 반드시 건을 쓰고 다닌다. 여자들도 항상 소복(素服) 차림을 하고, 처녀는 머리에 흰색 댕기를, 부인들은 쪽을 지고 그 위에 흰색 천을 덧대어서 상주임을 표시한다. 상주는 ‘부정 탄다’ 하여 남의 혼례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산가(産家)에도 가지 않는다.

망자가 돌아간 지 백일이 되는 날에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 졸곡제를 지낸 다음부터는 곡을 그치고, 제사를 지낼 때처럼 조용히 상식을 올린다. 망자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면 소상(小祥)을 지내고 2년이 되면 대상(大祥)을 지낸다. 소상, 대상은 큰 제사이기 때문에 자손들과 망자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참석한다.

과거에는 대부분 삼년상을 지냈기 때문에 대상이 끝나야 탈상을 했다. 대상을 지내고 지청을 걷고, 상주들은 상복을 벗는다. 지청과 상복, 상장은 모두 모아서 태운다. 100일 만에 탈상하는 가정이 있었으나, 요즘은 대부분 삼우제를 지내고 곧바로 탈상을 한다. 절에서 49재를 지내고 탈상하기도 한다.

[생활 민속적 의미]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베풀어진 상례에는 죽은 자를 대하는 산 자의 태도, 망자가 죽은 자의 세계로 영입되는 순서와 과정, 망자의 죽음을 공적으로 인식하는 과정, 장례를 준비하는 계 조직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족 구성원은 망자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 영혼을 위무해야 한다. 저승사자를 위해 사자상을 마련하고, 문상객들은 팥죽을 쑤어 가지고 가서 문상한다. 빈 상여를 꾸려 다음 날에 있을 발인을 준비한다.

묘지를 팔 때는 산신께 먼저 인사를 해 망자가 들어가게 됨을 알리고, 망자를 묻고 돌아올 때는 망자가 따라오도록 갔던 길로 돌아온다. 그 후로 2년 동안 집안에서 영혼을 위해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하며 망자의 넋을 위무한다. 망자가 죽은 후 2년이 되면 탈상을 한다. 이때부터 망자는 조상이 되어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로 대접을 받는다.

[참고문헌]
  • 이필영 외, 「민속」(『아산평택 택지개발 사업지구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충청문화재연구원·대한주택공사, 2006)
  • 이필영 외, 「아산시의 평생의례」상·장례(『한국인의 평생의례』-충남편, 국립무형문화재연구소, 2007)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