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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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衡平社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군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문경호 |
[정의]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전개된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 운동.
[개설]
도살업에 종사했던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법제상으로는 신분 차별이 철폐되었으나 그 후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에 맞서 1923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가 조직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예산에서도 2개의 형평사 예산분사(分社)가 조직되어 홍성·천안분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충청남도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산분사는 주로 사상적 투쟁보다는 경제적 지위 향상에 목표를 두고 활동하였다.
[역사적 배경]
형평사운동은 1923년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각 지역에 분사를 설치하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조선형평사는 “계급 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 향상, 백정을 의미하는 ‘도한(屠漢)’이라는 직업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 등 구호를 내걸고 활동하여 전국에 지사(支社) 11개소, 분사 67개소, 회원 40만 명의 대규모 운동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형평사는 각지에 형평청년회를 별도로 조직하고, 형평학우동맹, 형평여성단체를 운영하였으며, 기관지 『세광(世光)』을 발행하는 등 자체적으로도 교양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과]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충남에도 14개군에 35개의 지사가 조직되었다. 형평사 예산분사는 논산과 대전에 이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1920년대 예산 지역에서 청년회와 노동공제회 등 각종 사회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형평사 분사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기자들의 역할이 컸다. 예산 지역의 형평사 설립에도 당시 『중앙일보』 예산지부의 기자였던 김성준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형평사 예산분사는 각종 강연을 계획하고 예산에서 총대회 개최를 기획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총대회에서는 수육 판매 문제, 우피장 요금 문제 등 백정들의 차별과 관련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결과]
1930년대 들어 형평사의 전 간부였던 김광을 중심으로 하는 계열과 새로 선출된 신희안을 중심으로 하는 계열이 분리되어 대립하면서 예산 형평사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한 중에도 1930년 10월 16일 임시총회를 열어서 면천, 대흥, 광시, 온양, 성환 등의 대표들이 모여 자신들의 영업구역에 대해 합의하고, 1931년 4월의 정기총회에서는 두 계열의 갈등을 봉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1937년 일제의 압력을 받아 결국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예산 지역의 형평사는 충청남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직되어 각종 사회단체들과 연계하며 자신들에 대한 차별과 이권을 지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형평사의 활동 목적이 신분 차별에 대한 저항에서 경제투쟁 활동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형평사 안에서 서로 다른 세력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하면서 세력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백정들의 활동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