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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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制度 |
이칭/별칭 | 역참(驛站),우역(郵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호제 |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의 교통로상에 세워진 관영 교통 및 통신 시설.
[개설]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馬匹)의 공급,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을 역(驛)이라 하고,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원(院)이라 하였다.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설치되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 통칭되었으며,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은 487년(신라 소지왕 9)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고려시대에는 12~13세기 경 전국에 22개의 역도(驛道)와 525개의 역을 설치하였다.
조선 초기의 역제(驛制)는 대체로 고려의 역도–속역(屬驛) 체계를 계승하였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찰방(察訪)[종6품]이나 역승(驛丞)[종9품]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巡行)·고찰(考察)하면서 역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중앙집권을 추구하던 조선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역을 정비하였다. 세종 때 전국적인 규모의 도로망을 조직하여 44개의 역도에 538개의 역을 설치하였다. 중앙역은 병조나 승여사(乘輿司)의 지휘를 받았고, 지방은 찰방이나 역승에 의해 관리되었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 역승의 관장하에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을 맡게 하였다. 그중 역장은 역리 중에서 근면하고 신의가 있으며 문장을 해득할 수 있는 자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역로를 관리하는 역승의 폐단이 심해지자 1535년(중종 30) 역승을 없애고 찰방만을 두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나 지방의 관찰사, 절도사들은 발마패(發馬牌), 곧 마패를 지니고 있다가 역마를 사용할 경우 이를 제시하였다. 마패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발급하였는데, 원래 나무로 만들었다가 세종 때 철제로 바뀌었고, 『경국대전』 단계에는 다시 동제(銅製)로 바뀌었다. 둥근 패의 한쪽 면에는 사용자의 품계에 따라 이용 가능한 숫자만큼 말을 그려 넣고, 반대편에는 자호(字號)와 주조된 해[年]와 달[月], 그리고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는 전인(篆印)을 새겨 넣었다.
원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각 주요도로에 설치된 공공시설로, 대개 역과 함께 30리[약 11.78㎞]에 하나씩 설치하였다. 1445년(세종 27) 원을 정비, 보완하기 위해 부근의 주민 중에서 알맞은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고 원주전(院主田)을 지급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전국에 1,210개의 원이 있었으며, 충청도에는 212개가 있었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조에 “시흥도는 창덕, 일흥, 장시, 화천 4개역을 소관하고, 금정도는 광시, 세천, 용곡, 급천, 순성, 흥세, 하천, 몽웅, 해문, 청연 10역을 소관한다.(時興道所管驛四, 昌德, 日興, 長詩, 花川, 金井道所管驛十一, 光時, 世川, 龍谷, 汲泉, 順城, 興世, 豊田, 下川, 夢熊, 海門, 靑淵)”라고 하였다.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1462년) 8월 5일 정묘조에 “병조에서 아뢰기를, 이보다 먼저 제도(諸道)의 참역 또는 역승을 파하고 각각 그 부근에다 합하여 하나의 길을 만들어서 찰방을 두었으나, 관할 역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우므로 역로(驛路)가 조잔(凋殘)하니, 이제 다시 마감(磨勘)하여 대·중·소의 역로 및 원근을 나누어서 그 전의 역승을 각 역로에 차견(差遣)하여 찰방마다 역승 1명을 더 두게 하소서. 삼가 뒤에 갖추어 아룁니다. ...금정역·광시역·용곡역·세천역·몽웅역·해문역·청연역·풍전역·하천역 이상 9역은 금정도승(金井道丞)으로 일컫을 것[兵曹啓: “在先諸道站驛或罷, 驛丞各以附近合爲一道置察訪, 然所管驛多道里遙隔, 察訪未易遍察, 驛路凋殘, 今更磨勘分大中小驛路及遠近, 已前驛丞差遣各路, 每一察訪加設驛丞一. 謹開具于後. ... 金井驛, 光時驛, 龍谷驛, 世川驛, 夢熊驛, 海門驛, 靑淵驛, 豐田驛, 下川驛已上九驛, 稱金井道丞.”]라고 하였다.
『전록통고(典錄通考)』 이전 하 외관직 충청도 역승조에 “역승에 삼인을 두고, 이인도에 속한 역은 용전, 은산, 유장, 숙홍, 남전, 청화, 두곡, 신곡, 영유이고, 금정도에 속한 역은 광시, 해문, 청연, 세천, 용곡, 몽웅, 하천, 풍전이며, 시흥도에 속한 역은 창덕, 일흥, 급천, 순성, 응세, 장시, 화천이다.(“驛丞三員 利仁道屬驛, 龍田·恩山·楡楊·宿鴻·藍田·靑化·豆谷·新谷·靈楡. 金井道屬驛, 光時·海門·靑淵·世川·龍谷·夢熊·下川·豐田 時興道屬驛, 昌德·日興·汲泉·順城·興世·長時·花川.)”라고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 설치된 22개의 역도와 525개의 역 중 충청도에는 충청주도(忠淸州道)의 관할하에 수원(水原)에서 충남 부여와 충북 청주에 이르는 길에 34개 역과, 전공주도(全公州道)의 관할하에 전주(全州)와 공주(公州)에 이르는 길에 21개 역이 있었다.
현재의 충청남도 지역에 편제되었던 조선시대의 역도는 충청좌도의 성환도(成歡道)와 충청우도의 이인도(利仁道), 금정도(金井道), 시흥도(時興道)가 있었으며, 역승이 관리하였다.
성환도는 천안과 공주 사이의 신은(新恩)[천안]-김제(金蹄)[천안]-광정(廣程)[공주]-일신(日新)[공주]-경천(敬天)[공주]-평천(平川)[연산]-단평(丹平)[공주]-유구(維鳩)[공주]-금사(金沙)[연기]-장명(長命)[청주]-연춘(延春)[목천] 등 11개 역을 관리하였다. 금정도는 서해안 지역인 서산-홍성-보령 지역의 광시(光時)[대흥]-해문(海門)[결성]-청연(淸淵)[보령]-세천(世川)[홍주]-용곡(龍谷)[홍주]-몽웅(夢熊)[해미]-하천(下川)[태안]-풍전(豐田)[서산] 등 8개 역을 관리하였다. 시흥도는 서해안 북부 지역인 예산-당진 지역의 창덕(昌德)[신창]-일흥(日興)[예산]-급천(汲泉)[덕산]-순성(順城)[면천]-흥세(興世)[당진]-장시(長時)[아산]-화천(花川)[태안] 등 7개 역을 관리하였다. 이인도는 서천-부여-비인의 용전(龍田)[부여]-은산(恩山)[부여]-유양(楡楊)[정산]-숙홍(宿鴻)[홍산]-남전(藍田)[남포]-청화(靑化)[비인]-두곡(豆谷)[서천]-신곡(新谷)[한산]-영유(靈楡)[임천] 등 9개 역을 관리하였다.
현재의 예산군과 청양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의 역은 충청주도의 관할하에 있던 4곳이었다. 이 4개 역은 조선 전기에는 금정도 소속의 광시역과 금정역, 시흥도 소속의 일흥역과 급천역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 금정도와 시흥도의 관할하에 있었던 예산과 청양 지역의 4개 역이 조선 후기에는 모두 금정도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시흥도가 폐지되면서 시흥도 소속의 8개 역이 금정도 소속의 9개 역과 함께 금정도 찰방의 관할로 통합되었다. 숙종 연간에 간행된 『전록통고』에 시흥도 소속으로 일흥역과 급천역이 기록되어 있으나, 1757년(영조 33)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일흥역과 급천역이 금정 소속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1700년을 전후하여 변화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금정역의 소재지도 1656년(효종 7)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청양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여지도서』에는 홍주목 에 수록되어 있다. 시흥도가 폐지되어 8개 역이 금정도에 통합될 즈음에 금정도의 본역(本驛)도 홍주 용곡역(龍谷驛)[현재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각 주요 도로에 설치된 공공시설로 충청도에 설치된 원은 212개소였다. 그중에서 현재의 예산과 청양 지역에 설치된 원은 다음과 같다.
신례원은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창현 역원조에는 신창현에 속했던 것[親(新의 오자)禮院在縣西二十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757년 편찬된 『여지도서』 예산현 역원조에는 “(신례원은) 예산현 북쪽 15리[5.89㎞]에 위치하며, 사신을 영접하고 역마를 지급하던 곳[新禮院 在縣北十里 使客出站處]”이라 하였고, 1861년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내포 11읍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대로[內浦十一邑 通京大路]”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신례원이 18세기 이후에는 예산현에 있었고, 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례원 이외에 예산현의 무한성원(無限城院)과 고사원(古沙院), 덕산현의 봉용원(峯聳院)과 대흥현의 가방원(加方院), 청양현의 마양원(馬養院), 인여원(仁旅院), 건천원(乾川院), 가정자원(加亭子院) 등의 원이 17세기 중엽까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에 원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원들이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 연간에 간행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모두 '금폐(今廢)'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미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도로를 따라 설치되었던 역과 원은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사회제도의 변혁 및 교통의 발달로 폐지되었다. 즉, 1896년(건양 1)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역원 제도의 실체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역원 제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지방의 공무수행 관리에 역마 및 숙박 편의 제공과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교통·통신제도이다. 국가경영상 중요한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품계가 높지 않은 찰방과 역승의 관할 아래 있었고 역제(驛制) 운영상 폐단이 많아지면서 편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다만 현재 ‘역’, ‘원’ 자가 지역 명칭에 사용되는 곳이 그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