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천도교의 정신을 되살리는 사람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408
한자 東學-天道敎-精神-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만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시처 기미독립·무인멸왜 기념탑 -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삼거리[군덕리 170번지]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동학사상과 항일민족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

[개설]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많은 사람이 기포(起包)[동학농민운동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蜂起)하던 일]에 참여하였던 곳이며, 천도교로 개칭한 이후 후손들은 3·1운동 등 민족운동을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동학과 천도교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기념사업도 계속되고 있다.

[아산 지역의 동학 전래]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창도하였다. 누구나 하늘님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신분제를 뛰어넘어 백성들에게 만민평등의 꿈을 심어 주었다. 또한 잘못되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고자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사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다. 아산 지역에 동학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1870년대 말로 여겨진다. 최시형의 동학 경전 발행 역사를 보면, 제3차로 1883년 2월 목천(木川)의 간행소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발행하여 1천여 부를 동학 조직인 각 포에 반포한 기록이 나온다. 목천은 아산에서 한나절 거리이므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그해 여름 제4차로 경주판 『동경대전』의 발문에 충청도 아산 도인 안교선(安敎善)이 공주 도인 윤상호와 같이 실무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호서 대표자로 안교선이 참여한 것은 아산 지역 동학이 일정한 정도의 재력과 조직이 갖추어졌음을 방증한다. 안교선은 순흥안씨 찬성공파로서 1856년 2월 25일생이다. 안교선이 최시형을 직접 만나고 『동경대전』 발간에 참여할 정도라면 1883년에는 입도한 지 최소한 몇 년은 지났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에 아산 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는 최소한 1870년대 말임이 분명하다.

『천도교 아산교보』에는 온양 용화리에 사는 이규호(李圭鎬)·이규화(李鎬嬅) 부부가 1884년 11월 16일에 포덕사 최준모에 의해 입도한 기록이 있다. 이규호는 이신교의 처남으로 당진 신평에서 이사 왔다는 리한구의 증언을 종합할 때, 1880년 이후에는 아산과 내포 지역에 동학이 상당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산 지역 동학의 확산과 동학농민혁명내포 지역 일원으로 진행되었다. 박인호, 박덕칠 등 내포 지역의 뛰어난 지도자들에 의해 1892년 공주에서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893년 보은집회를 거쳐 동학 세력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내포 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아산]

1894년 3월 호남 지역에서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떨쳐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5월 초 전주를 점령하고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그때까지 아산을 비롯한 내포 지역에서 조직적 봉기는 없었지만, 각처에서 관에 저항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관을 무서워하지 않고 활동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 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요청한 청병 3천여 명이 5월 5일에서 7일 사이에 아산 지역 백석포에 상륙하였다. 5월 8일 일본군 1만여 명이 인천에 상륙하였고, 3천여 명이 한양에 진주하였다.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 점령한 일본군은 김홍집 친일 내각을 출범시키고 바로 4,500여 명의 병력을 아산으로 출발시켰다. 6월 27일 성환에서 청군을 패퇴시킨 일본군은 곧바로 청군 주둔지인 아산현을 점령하고 이후 백석포에서 승전 행사를 벌였다.

청일전쟁의 폐해를 직접 겪은 아산과 내포의 동학은 7월 말 이후 여러 포(包)에서 일본군을 응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9월 3일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일본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자는 보국안민의 기치로 재차 기포하고 삼례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내포 일대의 군현 수령들과 유생들은 동학농민군을 회유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탄압하였다. 서산과 태안군수는 30여 명의 접주와 간부들을 체포하여 가두고 10월 1일에 모두 처형하기로 하였다.

9월 18일 동학 교단이 총기포령을 내리자, 내포의 동학농민군은 10월 1일 서산관아를 혁파하였다. 10월 5일에는 덕포를 중심으로 아산관아를 공격하여 군병기를 탈취한 후 신창 지루동에 모였다가 합류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홍주를 제외한 온양, 신창, 아산, 덕산, 예산, 면천, 해미, 서산, 태안 등 대부분의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 이 시기 아산 지역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이신교, 정태영, 곽완, 김경삼, 안교선 등이었다.

내포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의 호남, 손병희의 호서 동학농민군에 합세하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 당진 승전목전투와 예산 신례원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우금치전투에서는 내포의 마지막 관문인 홍주성 점령에 실패하였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 유회군(儒會軍)은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을 공격하고 보복을 자행하였다. 11월 말까지 해미, 서산, 태안 등에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살육이 이어졌는데, 태안에서는 일본군이 작두로 농민군 머리를 베는 장면을 농민들이 보도록 강제 동원하였다. 아산 지역에서는 관군이 진격하면서 10월 25일부터 11월 6일 사이에 동학농민군 참여자를 색출하여 천안이나 순무영(巡撫營)[반란을 수습하기 위한 임시 군영(軍營)] 으로 압송하거나 처형하였다. 관군은 온양 읍내리, 신창 앞길, 도고 시전리, 예산 역촌 앞길에서 수십 명을 처형하였다.

[동학을 이은 천도교 아산 지역 독립운동]

동학 3세 교조 손병희(孫秉熙)[1861~1922]는 동학란으로 탄압받던 교단을 1905년 12월 초에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부터 전국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천도교는 중앙수련회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손병희를 비롯하여 15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자금과 인쇄를 책임지고 전국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다.

아산 지역 3·1운동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3월 11일 교내에서 시도하고, 3월 12일 온양장터에서 본격 전개하였다. 온양장터에서는 3월 14일에도 만세운동이 이어졌는데, 이는 현창규가 주도하였다. 현창규는 당시 23세로, 서울에서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천도교 도사 권병덕에게 온양 3·1운동을 권유, 지시받았다.

현창규는 고향에 내려와 같은 마을 신인리에 사는 서만수, 옆 마을 법곡리에 사는 권태원, 김치삼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시장 군중에게 배포하고 학생 100여 명 등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은 온양 장날이 아니어서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 온천리 헌병분견소 헌병 6명과 수비대 10명이 출동하였고, 주모자 22명이 체포되었다. 정규희(丁奎熙)[1895~1979]가 주도한 4·4선장만세운동도 천도교가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정규희는 본관이 나주(羅州), 호는 규암(奎菴), 아명은 수길(壽吉)인데 일제는 아명으로 기록하였다.

정규희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김천봉(金千鳳), 서몽조(徐蒙祚), 임천근(林千根), 오상근(吳相根)과 함께 4월 4일 선장 장날을 택하여 2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도록 선도하였다. 정규희는 군중을 지휘하며 선장면 헌병주재소에 몽둥이를 휘두르며 돌입하여 투석전을 전개하고 구내에 진입하여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아버지 정태영이 동학 접주로 천도교 예산교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정태영의 지도·도움으로 다수 천도교인이 합세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체포된 정규희는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규희는 이후 1926년 순종 황제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온양에서 체포되어 다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천도교 무인멸왜기도운동(戊寅滅倭祈禱運動)은 1836년 8월 14일에 당시 천도교 4세 교주였던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1854~1940] 대도주의 밀령으로 시작되었다. 교인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 식사 후에 ‘일본놈을 없애자’는 기도를 정성껏 하고 특별 성금을 모금하였다. 무인멸왜기도운동은 1938년 2월 17일에 황해도 신천경찰서에서 홍순의와 일대 교인들이 체포되면서 드러났다.

아산 지역은 3월 중순부터 4월 초에 교인들이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호(李圭鎬)[1861~1939], 이보성(李寶成), 강창주(姜昌周), 이창운, 이명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 당시 아산 접주였던 이신교(李信敎)[1840~1894]의 장남 이종일(李鐘一)[1879~1940]과 차남 이종선(李鐘宣)[1889~1943], 그리고 정규희 등이 온양경찰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7~13일 만에 모두 석방되었다. 일제는 검거한 사람에 가혹한 고문을 가했는데, 중일전쟁 중이라 재판에 넘기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5월 1일에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같은 지면에 천도교가 전향 성명을 발표하였다. 천도교는 5월 12일 기소유예로 풀려난 핵심 간부 5명을 출교하였다. 일제는 무인멸왜기도운동이 드러난 후 경전에서 멸왜기도문을 삭제하였고, 천도교 내의 반일 세력을 모두 없애도록 강제하였다.

[동학 후손 주도로 기미독립·무인멸왜운동기념탑을 세우다]

정해곤(丁海坤)은 1979년 할아버지 정규희 장례식장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활동하였던 천도교 중앙총부 지도자들을 만났다. 당시 개신교로 개종한 정해곤은 "자네 선택을 존중하네, 다만 동학 정신과 조부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게"라는 얘기를 듣고 감명을 받는다.

하지만 정해곤은 가난한 살림으로 주변을 돌아볼 겨를 없이 농사에만 전념하였다. 1991년경 정해곤은 국가와 충청남도가 소유한 농경지를 불하받기 위해 주변 농민들과 노력하던 중에 아산농민회에 가입하였고, 농민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정해곤은 위탁영농회사를 운영하며 쌀 전업농으로 나섰고, 2000년에는 맛 좋은 선장 쌀을 알리기 위해 소규모 정미소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1년에 아산농민회장을 맡아 농민운동에 앞장서면서 사회운동 전반을 접하고, 생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동학사상과 정규희의 선양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아산 지역 동학과 천도교는 증조할아버지 정태영동학농민혁명 때 홍주성전투에 같이 출정하였다가 전사한 이신교 접주의 손자이자 천도교 관지포 도정을 역임한 리한구(李漢求)가 해박하고 신념이 더 강하였다. 두 집안은 딸과 아들을 혼인시킨 사돈 간이다. 정해곤은 리한구에게 지도를 받으며, 리한구의 아들 리인철과 구체적으로 사업을 논의하였다. 아산 지역 3·1운동 관련 기념물이 하나도 없다는 신문 기사가 난 이후였다.

2005년 정해곤은 유족대표로 선장면발전협의회 내 3·1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기념탑을 선장초등학교 내에 두려고 하였으나 당시 교장이 관리가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였고, 만세운동을 벌였던 장소는 모두 사유지였다. 2006년 3월 1일 ‘기미독립·무인멸왜운동기념탑’을 선장면 군덕리삼거리[군덕리 170번지]에 세웠는데, 각계각층의 성금과 아산시 홍성보훈지청의 보조 등 총 1억 3천만 원이 투입되었고, 설계와 시공은 건축사인 리인철이 재능 기부를 하였다. 탑 발문과 기념시는 리한구가 썼고, 당시 일제에 의해 고초를 당한 분들의 모습을 탑에 새겼다. 해마다 4월 4일에 선장초등학교에서 기념식을 하고 기념탑까지 1.4㎞ 정도를 행진하고 추모제를 지낸다.

[동학사상과 항일민족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

아산농민회 회장 이후 정해곤은 생업을 이어가면서 4·4선장만세운동기념사업과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일을 병행하며 동학사상과 항일민족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산YMCA 이사장을 맡은 정해곤은 2014년 하반기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에 관심이 많은 전국농민회총연맹 충남도연맹과 천도교아산시교구, 아산시민연대 관계자를 만나 의기투합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2015년 4월 15일 첫 준비 모임을 하고 2015년 10월 5일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아산시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였다.

기념사업회에는 동학농민혁명 유족, 아산농민회, 천도교아산시교구, 아산시민연대, 아산YMCA, 민주노총세종충남본부, 아산시의원, 역사교사, 정당인 등 동학농민혁명과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고 헌신적인 지역사회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초대 이사장에 정해곤, 상임이사에 최만정이 선임되었다. 기념사업회는 아산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된 과정을 책으로 펴내고, 아산시로 하여금 학술용역조사를 하도록 하였으며, 해마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과 강연, 위령제 및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와 함께 2016년에는 아산 지역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을 민·관이 미리 준비하자는 안을 주도적으로 제기하여 2016년 9월 25일 60여 시민사회단체와 아산시, 아산시의회, 아산시교육지원청이 참여한 가운데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이하 3·1운동기념추진위]가 창립되었고 정해곤은 상임대표를 맡았다. 3·1운동기념추진위는 아산 지역의 3·1운동 전반을 조사·연구하여 책자를 발간, 보급하고 당시 시위 장소 32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아산시는 항일민족운동 기념사업 지원 조례를 제정하였고, 아산항일민족운동 자료 전시관을 세우고 2019년 4월 4일 개관식을 하였다.

[대를 이어 항일운동을 벌인 정해곤 집안 이야기]

"나라를 위해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이다.", "나 살아서는 하지 마라, 내가 죽은 뒤에는 모르니까 신청을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

애국지사 정규희가 광복회 아산예산연지회장 정해곤에게 한 이야기이다. 1976년 정해곤은 할아버지 정규희가 살아있을 때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려고 서류를 준비하였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선장면 4·4만세운동에 함께 참여하였던 임천근·서몽조까지 포함하였던 서훈 공적서들은 "내 것은 빼라."라는 할아버지 정규희의 말씀에 제출하지 못하였다.

정해곤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정규희가 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일본인들이 ‘명예면장’을 시켜 준다고 아무리 회유해도 거부하였다고 한다. 정규희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삼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공훈 조사에도 응하지 않았다. 당연히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을 정도였다.

애국지사 정규희 가족은 고난의 삶을 살았다. 정해곤의 아버지 정완진(丁完鎭)[1922~1972]은 1943년에 일제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가 광산에서 일하다 진폐증을 얻어 평생 병치레로 고생하였다. 3남 3녀 중 막내인 정해곤은 197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학비가 없어서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형제자매는 결혼하였거나 돈 벌러 나갔고, 집에는 어머니 조기현[1921~2002]과 정규희만 남았다. 정해곤은 어린 나이였지만, 600평[약 1,985㎡] 밭뙈기 농사를 짓고 가을에는 탈곡기를 따라다니며 살림을 꾸려나가야만 했다.

정규희는 늘 새벽마다 깨끗한 물로 청수를 떠서 기도하였으며, 천도교인들이 집에 수시로 찾아왔다. 정규희는 4·4선장만세운동을 주도하여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고, 천도교 예산교구에서 핵심 간부로 일하며 6·10만세운동과 천도교 무인멸왜기도운동에 참여하여 숱한 고초를 겪었다. 광복 전후부터 천도교 예산교구장을 세 차례 지냈으며, 천도교 종가로 여겨지는 관지포 도정을 지냈다.

"네 증조할아버지는 나보다 일을 훨씬 더 많이 하신 분이다."

정규희는 증조할아버지 정태영(丁泰榮)[1859~1922]에 관해 자주 이야기하였다. 동학의 직강, 접사였고, 동학농민혁명 때는 접주로 신창에서 기포한 정태영은 홍주성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예산과 공주 접경 지역인 첩첩산중 대술 이티로 도피한 후 1895년 정규희를 얻었다. 세상이 잠잠해지자 다시 선장면 군덕리로 이사하였고, 1904년에는 동학에서 조직한 민회(民會)인 진보회 온양지회에서 활동하였다. 동학이 1905년 12월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후에는 천도교 예산교구와 천도교 홍성교구 등에서 1919년까지 핵심 직책을 지냈다. 1907년에는 정규희천도교에 입교시키고 1908년에는 신창사립신민학교에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정해곤은 할아버지 정규희가 한사코 독립운동 유공자 등록을 반대할 때는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였지만, 증조할아버지 정태영에 대한 존경심으로, 정태영에게 3·1운동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그 공을 사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한다. 1979년 5월 23일 정규희가 사망하자 정해곤은 정규희의 등에 시커멓게 드러난 채찍 자국을 보았다고 한다. 정규희는 3·1절 즈음마다 선장초등학교 등에서 강연하거나 만세삼창을 하였다. 정규희가 독립유공자로 정식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선장 사람들은 누구나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대우하였다. 정규희의 장례식은 선장면장 주관으로 치러졌고, 그다음 해 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광복절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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