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35
한자 兪鎭元
영어공식명칭 Yu Jinw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장존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만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8월 19일 - 유진원 이남규 살해 광경 목격 및 이남규 시신 보호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장존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지도보기
성격 마을 주민
성별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항일운동가 이남규가 살해되자 시신을 지켜준 마을 주민.

[개설]

유진원(兪鎭元)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가 1906년(고종 43) 홍주의진(洪州義陣)과 연관되었다는 혐의로 일본군에 의해 연행되던 중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에서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시신을 잘 지켜주었다.

[가계]

유진원은 충청남도 온양군 군내면 장존리[현재 아산시 장존동] 출신이다. 그 밖의 사항은 파악되지 않는다.

[활동 사항]

조선 후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안동부관찰사,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지낸 이남규는 을미사변 이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으로 낙향하였다. 1906년 홍주의진이 5월 31일 홍주성에서 퇴각한 후, 의병장 민종식(閔宗植) 등은 홍주성 탈환을 위해 이남규 집에다 본부를 두었다. 허나 10월 2일 발각되어 이남규는 민종식의 거처를 찾으려는 일본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남규는 이후 풀려났으나 홍주의진과 연관되었다는 일진회원의 밀고가 끊이지 않아, 1907년(고종 44) 8월 19일 일본군에 의해 공주 감옥으로 끌려가던 중, 온양 평촌[혹은 외암촌] 냇가에서 일본군에 의해 아들 이충구(李忠求), 노비 김응길(金應吉)과 함께 살해되었다. 나머지 한 명의 노비인 가수복(賈壽福)은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졌다.

당시 송악면 평촌리에 거주하던 유진원이 이러한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일본군들이 물러간 후 달려가서 시신을 지키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검은 구름이 시신을 감싸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가원(李家源)이 찬(撰)하고 이석구(李奭九)가 쓴 이남규 묘비(墓碑)에 쓰여 있다.

[의의]

『아산 지역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학술조사용역 결과보고서』에 "1913년 3월 23일 [독립의군부] 임병찬(林炳瓚)은 이명상(李明翔), 이인순(李寅順) 등과 논의해 각 도와 군의 대표자 302명을 선임했고, 충청도 대표로는 유준근(柳濬根), 각 군 대표자로 43명을 선정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온양 대표자로는 이붕렬(李鵬烈), 유진원(兪鎭元)이 선임되었다."라는 표현에서 유진원이 등장하는데, 동일 인물인지는 추가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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