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34
한자 李峻永
영어공식명칭 Lee Junyoung
이칭/별칭 운계(雲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만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 1월 9일연표보기 - 이준영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0년 9월 20일 - 이준영 대한제국군 육군보병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3년 9월 16일 - 이준영 견습참위로 보직
활동 시기/일시 1904년 8월 12일 - 이준영 진위대참위로 강화도에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월 26일연표보기 - 이준영 진위보병 제2대대에 보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4월 30일연표보기 - 이준영 시위보병 제3연대 제1대대로 전속된 후 다시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에 배속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7월 3일 - 헤이그 밀사 사건 보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7월 19일 - 고종 퇴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7월 24일 - 한일신협약 강제 체결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7월 31일 - 군대 해산 조칙 반포
몰년 시기/일시 1907년 8월 1일연표보기 - 이준영 대한제국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이준영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준영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용두리 591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817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군인
성별
본관 덕수
대표 경력 대한제국군 참위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대한제국군 해산에 맞서 싸운 군인.

[개설]

이준영(李峻永)[1879~1907]은 1907년(고종 44) 4월 30일 대한제국군 시위보병(侍衛步兵) 제2연대 1대대에서 복무하던 중 군대 해산에 격분하여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사망하였다.

[가계]

이준영의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운계(雲桂)이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형인 이요신(李堯臣)의 12대손이다. 1879년(고종 16) 1월 9일 태어났고, 아버지는 이민학(李民學)이며, 본적은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용두리 591이다.

[활동 사항]

이준영은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8세에 상경하여 전보학교와 중교의숙(中橋義塾)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00년(고종 37) 9월 20일 대한제국군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고종 40) 9월 16일 견습참위(見習參尉)로 보직되었다. 1904년(고종 41) 8월 12일 진위대참위(鎭衛隊參尉)로 강화도에서 근무하였다. 1907년(고종 44) 1월 26일 진위보병(鎭衛步兵) 제2대대에 보임되었으며, 1907년 4월 30일 시위보병 제3연대 제1대대로 전속되었다가 다시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었다.

1907년 7월 3일 보도된 헤이그(Hague) 밀사 사건을 빌미삼아 조선의 초대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황제의 퇴위를 요구하였고, 7월 19일 양위(讓位) 조칙으로 고종이 물러났다. 일제는 7월 24일 통감 직접 통치와 군대 해산 등을 담은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고, 7월 31일 밤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는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함께 입궐하여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 해산 조칙을 반포시키도록 하였다.

8월 1일 아침 대한제국군 해산을 위하여 전 병력을 완전 비무장으로 10시까지 연병장에 집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이에 불응하고 버티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參領) 박승환(朴昇煥)이 군대 해산을 거부하며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제1연대 제1대대 병사 591명이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로 무장봉기하여 병영을 장악하였고, 제2연대 제1대대도 합류하였다. 미리부터 병력을 증강시키고 대한제국군 무기를 최소화시켰던 일본군 공격에 맞서 대한제국군은 3시간 이상 병영을 사수하였고, 이후 밤늦게까지 시가전을 전개하며 저항하였다. 이준영도 소대장 참위로서 앞장서 싸웠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군도 100여 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우리 측에서도 중대장 정위(正尉) 오의선(吳儀善)·권중협(權重協), 참위 이준영·장세정(張世禎)·노덕세(盧德世)·이규병(李圭兵)·이한승(李漢承), 견습참위 이긍주(李肯周)·이충순(李忠純)·백보용(白普鏞)·남상덕(南相悳), 특무정교(特務正校) 김순석(金順錫)·고희순(高喜淳) 등이 전사하고 다수 사상자가 났다.

[묘소]

이준영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817에 묻혀 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이준영의 공을 기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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