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87
한자 趙萬永
영어공식명칭 Cho Manyeong
이칭/별칭 윤경(胤卿),석애(石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선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6년 5월 5일연표보기 - 조만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16년 - 조만영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전라도관찰사 김계온을 파직하게 함
활동 시기/일시 1818년 - 조만영 심양사 한용구와 함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819년 - 조만영 부사직에 임명, 풍은부원군에 봉해짐
활동 시기/일시 1820년 - 조만영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금위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26년 - 조만영 예조판서, 이조판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28년 - 조만영 이조판서로서 훈련대장을 겸함
활동 시기/일시 1830년 - 조만영 호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34년 - 조만영 호위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35년 - 조만영 어영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38년 - 조만영 훈련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39년 - 조만영 천주교도 일대 탄압으로 안동김씨 세력 축출 기반 마련
추모 시기/일시 1843년 - 조만영 영세불망비 건립
활동 시기/일시 1845년 - 조만영 헌종에게 궤장을 하사받음
몰년 시기/일시 1846년 10월 14일연표보기 - 조만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46년 10월 - 조만영 영의정 추증, 충경공 시호 내림
추모 시기/일시 1856년연표보기 - 조만영 신도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 조만영 신도비 이전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조만영 묘 -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지내리 산51-7번지
성격 문관
성별
본관 풍양
대표 관직|경력 이조판서|훈련대장

[정의]

조신 후기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거주하였던 문신이자,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의 아버지.

[개설]

조만영(趙萬永)[1776~1846]은 왕실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배경으로 주로 병권을 담당하면서 풍양조씨(豊壤趙氏) 가문이 중앙정치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하여 세도정치의 한 축을 이루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가계]

조만영의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윤경(胤卿), 호는 석애(石崖)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조도보(趙道輔)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처음 고구마를 들여온 이조판서 조엄(趙曮)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진관(趙鎭寬)이다.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부사(府使) 홍익빈(洪益彬)의 딸이다. 부인은 은진송씨(恩津宋氏)로, 목사(牧使) 송시연(宋時淵)의 딸이다. 효명세자(孝明世子)[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이라 함]의 빈(嬪) 조씨(趙氏)[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의 아버지로서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의 형이다. 한때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조만영은 음서(蔭敍)[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로 능원랑(陵園郎)을 지내다가,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지평(持平)·정언(正言)·겸문학(兼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816년(순조 16) 전라도 암행어사 때에는 각종 세금 징수의 부당함을 상소하여 전라도관찰사 김계온(金啓溫)을 파직하게 하였다. 1819년(순조 19)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 딸이 효명세자의 빈으로 책봉되어, 이에 따라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1826년(순조 26)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27년(순조 27) 순조가 안동김씨(安東金氏)를 견제할 목적으로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하자 1828년(순조 28) 이후 조만영이 이조판서와 훈련대장(訓鍊大將)을 겸하면서 풍양조씨 세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가 병으로 죽자 풍양조씨 일파가 권력에서 밀려났지만, 조만영은 호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역임하면서 어린 세손[헌종]의 보호에 힘썼다. 헌종 즉위 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 아래에서도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맡아 군권을 장악한 채 풍양조씨 세력을 키워 나갔다. 1839년(헌종 5)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을 전개하면서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841년(헌종 7)부터 헌종의 친정(親政)이 이루어지자 외척으로서 풍양조씨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1845년(헌종 11) 헌종으로부터 궤장(几杖)[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几)와 지팡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문중 내에서의 내분과 아들 조병귀(趙秉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후 눈이 멀어 병사하였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신운리 구루물 일대의 전답이 조만영의 땅이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동원인물고(東援人物考)』가 있다.

[묘소]

조만영의 묘소는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지내리 산51-7번지에 있다. 묘 앞에는 김흥근(金興根)이 짓고 김세균(金世均)이 써서 1856년(철종 7)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는 조만영이 살아 있던 1843년(헌종 9)에 세운 조만영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원래 아산현 관아 입구 근처에 세웠던 것으로 1911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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