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591
한자 洪萬朝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1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45년 - 홍만조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25년 - 홍만조 사망
건립 시기/일시 1769년연표보기 - 홍만조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홍만조 신도비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17 지도보기
성격 비석
양식 비좌개석
관련 인물 홍만조
재질 화강석
크기(높이,너비,두께) 180㎝[높이]|78㎝[너비]|33㎝[두께]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홍만조의 신도비.

[개설]

홍만조 신도비(洪萬朝神道碑)는 조선 후기의 문신 홍만조의 사적을 기리며 묘 앞에 세운 비이다. 홍만조(洪萬朝)[1645~1725]는 본관이 풍산(豊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晩退)이다. 홍이상(洪履祥)의 손자로, 할아버지는 홍탁(洪鐸), 아버지는 홍주천(洪柱天),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홍만조는 1678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각 도 관찰사를 지내고 형조판서 등을 거쳐 171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22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건립 경위]

홍만조 신도비는 사후 40여 년이 지난 1769년에 건립되었다. 호조판서 권이진(權以鎭)[1668~1734]이 비문을 짓고, 족증손(族曾孫) 즉 증손자가 되는 풍산홍씨 집안의 홍양한(洪良漢)[홍양호(洪良浩)로 개명, 1724~1802]이 글씨를 쓰고, 역시 족증손인 홍명한(洪名漢)[1724~1774]이 전서(篆書)를 했다.

홍만조 신도비의 비문은 홍만조가 영의정에 증직(贈職)된 1729년부터 비문을 지은 권이진이 사망한 1734년 사이에 찬술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신도비에 새겨진 자손(子孫) 항목에서 1750년 이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1769년 신도비 건립 시에 비문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1730년대에 권이진이 찬술한 비문으로 비석을 건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홍만조의 아들 홍중징(洪重徵)[1682~1761]은 이익(李瀷)에게 묘갈문(墓碣文)을 부탁하였다. 신도비의 비문은 그즈음에 최종적으로 권이진의 글이 수정되어 새겨져 있다.

[위치]

홍만조 신도비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산22-16번지의 풍산홍씨 종중 묘역 남서쪽 끝 홍만조 묘의 남쪽에 있다. 세교2리 안골 마을회관 동남쪽 200m 정도 지점의 언덕 위 길가에 있다.

[형태]

홍만조 신도비는 낮은 네모난 비석 받침[碑座] 위에 비신(碑身)과 지붕돌[蓋石]을 올려놓은 형태로 모두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지붕돌의 양식은 비석이 건립된 1769년의 것으로 볼 수 없고 18세기 초에 제작한 것이다. 아마도 홍만조 사망 몇 년 후인 1720년대 후반에 신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석재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신은 높이 180㎝, 너비 78㎝, 두께 33㎝이다.

[금석문]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증영의정 시정익 만퇴홍공 신도비명(崇祿大夫判敦寧府事 贈領議政諡貞翼神道碑銘)

[현황]

홍만조 신도비는 비각 안에 있다. 비각의 용마루가 짧고 추녀를 상대적으로 길게 조성한 모습이나 지붕돌[개석]에 돌이끼가 많이 낀 것으로 보아 비각은 근래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홍만조는 풍산홍씨 남원공파 아산 지역 입향조이다. 홍만조 신도비는 비문과 비석 지붕돌이 18세기 초 양식인 점이 특징이다. 또한, 지방관으로서 조선 8도 중 7개 도의 관찰사를 비롯하여 중앙 관직을 두루 지냈다. 홍만조는 기로소에 들어가 『기사계첩(耆社契帖)』에도 포함되어 있다. 홍만조 신도비는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역사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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