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홍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00
한자 任弘望
영어공식명칭 Im Hongmang
이칭/별칭 덕장(德章),죽실거사(竹室居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임홍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임홍망 생원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임홍망 별시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 승문원에 소속됨
활동 시기/일시 1674년 - 임홍망 정원에 임명, 예송 논쟁으로 경성판관으로 좌천
활동 시기/일시 1682년 - 임홍망 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5년 - 임홍망 황해도관찰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87년 - 임홍망 공홍도관찰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임홍망 경주부윤에 임명, 사직 반려
몰년 시기/일시 1715년연표보기 - 임홍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72년 - 임홍망 증시를 받드는 연시가 열림
거주|이주지 거주지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성격 문관
성별
본관 풍천
대표 관직|경력 공홍도관찰사|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충청도 아산 출신의 문신.

[개설]

임홍망(任弘望)[1635~1715]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송시열 문하의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에 굴하는 일이 없었다.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송시열 사후 임홍망이 아산에서 상여꾼 수십 명을 데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조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임홍망이 아산에 기반이 있었고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산 관아의 문루 명칭을 여민루(慮民樓)라 지은 것도 임홍망이었다.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누기(樓記)의 ‘취위민지의(取爲民之意)[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하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가계]

임홍망의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덕장(德章), 호는 죽실거사(竹室居士)이다. 임기(任琦)의 증손이며, 임희지(任羲之)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증(贈) 좌참찬 임환(任喚)이고,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신방헌(申邦憲)의 딸이다. 형 임홍재(任弘載)와 임홍익(任弘益)이 있다. 부인은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여관(成汝寬)의 딸이다. 아들 임형(任泂)이 있다. 7대손 임헌회(任憲晦) 역시 아산 출신이다.

[활동 사항]

임홍망은 아산 지역에 세거하는 풍천임씨(豊川任氏) 집안의 인물이다. 그러나 1657년(효종 8) 생원시에 입격(入格)하였을 때에 『사마방목(司馬榜目)』에 기록된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을과(乙科) 1위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소속되었다. 이후 도원찰방(桃源察訪), 가례도감(嘉禮都監) 감조관(監造官), 전적(典籍)을 지냈다. 현종이 세상을 뜨자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이 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벌어지자 송시열을 옹호하다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울산부사가 된 후 송시열의 유배지인 장기[현재 경상북도 포항시]를 자주 드나들었다. 1682년(숙종 8) 승지가 되었고, 1685년(숙종 11) 황해도관찰사, 1687년(숙종 13)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지만 오랜 시간 승지로 재직하였다. 진위사(陳慰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승지가 되었다가 정치가 어지럽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89년(숙종 15) 다시 경주부윤이 되어 부임하던 중에 이이(李珥), 성혼(成渾)이 문묘(文廟)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표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민비가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후에 형조참의, 도승지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80세가 되자 품계를 높여 정2품에 이르렀는데, 1년이 지난 후 세상을 뜨고 말았다. 1715년(숙종 41) 『숙종실록』에 기록된 졸기(卒記)에 의하면, 임홍망은 순박한 사람으로 여러 번 지방관을 지내며 명성은 없었다고 하였다. 숙종 때는 당쟁이 심하던 시기였으므로,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죽실집(竹室集)』 2권이 있다. 임홍망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여보게 내 고향 일 알고 싶거든[욕식오향사(欲識吾鄕事)]

눈을 떠 높이 바라보게[유당간안고(唯當看眼高)]

두우성(斗牛星) 반짝이는 하늘 위에서[지금두우상(至今斗牛上)]

남은 기운 칼 위에 내려 비치네[여기사용도(餘氣射龍刀)]

[상훈과 추모]

효정(孝貞)의 시호를 받았다. 1872년(고종 9) 3월 25일 임홍망의 본가가 있는 아산에서 증시(贈諡)[사후에 행적을 기려 시호를 증여하는 것]를 받드는 연시(延諡)[시호를 물려받는 행사]가 행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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