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강학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05
한자 西巖講學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795년연표보기 - 『서암강학기』 저술
간행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서암강학기』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 60-1]
성격 문집
저자 정약용
간행자 신조선사(新朝鮮社)
권책 154권 76책[여유당전서]
행자 13행 28자
규격 13.6㎝[가로]|20.6㎝[세로]
어미 상흑어미(上黑魚尾)
권수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판심제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

[정의]

다산 정약용이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있는 봉곡사에 머물며 성호 이익을 기리기 위해 강학회를 열면서 지은 글.

[개설]

정약용(丁若鏞)은 1795년(정조 19) 7월 26일 나이 34세에 주문모(周文謨)[야고보] 신부 입국사건으로 금정도(金井道)[현재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 찰방(察訪)으로 외보(外補)[지방관에 보임(補任)]되었다. 이때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에게 청하여 온양의 석암사(石巖寺)에서 만났는데, 당시 내포(內浦)의 이름 있는 집 자제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날마다 수사(洙泗)의 학(學)[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강학하고, 사칠(四七)[사단칠정(四端七情)]의 뜻과 정전(井田)의 제도에 대해서 물었으므로 별도로 문답을 만들어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지었다.

[저자]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이다. 정약용은 정조 연간에 문신으로 벼슬살이를 하였으며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유배생활을 장기간 보냈다. 신유사옥(辛酉邪獄) 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정약용 스스로의 학문 체계를 완성하였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기도 하였으며 사회주의 토지 정책, 과학기술, 정치 개혁의 이념을 제시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론을 추구하였으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저술하였다. 특히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건축기술인 거중기(擧重器)를 고안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정약용은 충청도 금정역(金井驛)의 찰방으로 좌천되어 5개월여를 보냈는데, 온양 서암(西巖)의 봉곡사(鳳谷寺)에서 목재 이삼환 등 13명의 실학자들과 10일 동안 머물면서 이익의 유고인 『가례질서(家禮疾書)』[『성호가례질서(星湖家禮疾書)』]를 편집·교정하며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정약용은 그때의 일을 『서암강학기』에 기록하여 남겨두었다.

[형태/서지]

『서암강학기』는 다산 시문집 제21권 서(書)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서암강학기』의 제일 첫 부분에는 봉곡사 일대의 풍경과 당시의 상황이 잘 드러나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건륭(乾隆) 말년인 을묘년[1795년] 10월 24일에 나는 금정에서 예산의 감사(坎舍)[재실(齋室)]로 갔는데, 그때 목재 이 선생이 먼저 와서 계셨다. 26일에 한곡(閑谷)에 이르러 이문달(李文達)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10리[약 4㎞]를 더 가서 소송령(疎松嶺)을 넘고, 또 10리를 가니, 그곳이 바로 온양 서암의 봉곡사이다. 그 다음 날에 목재께서 왕림하셨다. 이때 가까운 고을에 있는 여러 사우(士友)들이 차례로 모여들어 사문(師門)의 유서(遺書)를 교정하였는데, 먼저 『가례질서』를 가지고 그 범례를 정하였다. 봉곡은 온양의 서쪽에 있는데, 그 남쪽은 광덕산(廣德山)이요, 서쪽은 천방산(千方山)이다. 첩첩으로 둘러싸인 높은 봉우리와 울창한 숲, 깊은 골짜기의 그윽함이 즐길 만한 곳이었다. 이때 이른 눈이 내려 한 자[尺][30㎝ 내외]나 쌓여 있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시냇가에 나가서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서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였으며, 저녁에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소요(逍遙)하면서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연기와 구름이 섞여서 산기(山氣)가 더욱 아름다웠다. 낮에는 여러 친구들과 질서(疾書)를 정서하였는데, 목재가 직접 교정을 하셨으며, 밤에는 여러 친구들과 학문과 도리를 강론하였는데, 때로는 목재께서 질문하고 여러 사람들이 대답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질문하고 목재께서 변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10일이나 하였으니,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다음은 목재 이삼환 등 13명의 실학자 명단을 기록하였고, 13명의 실학자들이 성호 이익을 추앙하는 시를 비롯하여 목재 이삼환과 유생들이 서로 문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생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삼환(李森煥)의 자(字)는 자목(子木), 기유생이며 여흥인(驪興人)이다.

이광교(李廣敎)의 자는 문달(文達), 병자생이며 한산인(韓山人)이다. 승지(承旨) 이수일(李秀逸)의 손자이다.

이재위(李載威)의 자는 우성(虞成), 정축생이며 여흥인이다. 제학(提學) 이하진(李夏鎭)의 현손(玄孫)이다.

박효긍(朴孝兢)의 자는 사옥(嗣玉), 정축생이며 밀양인(密陽人)이다.

강이인(姜履寅)의 자는 사빈(士賓), 기묘생이며 진주인(晉州人)이다. 참판(參判) 강세구(姜世龜)의 현손이다.

이유석(李儒錫)의 자는 여앙(汝昻), 경진생이며 함평인(咸平人)이다. 헌납(獻納) 이일운(李日運)의 아들이다.

심노(沈潞)의 자는 중심(仲深), 신사생이며 청송인(靑松人)이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심액(沈詻)의 현손이다.

정약용의 자는 미용, 임오생이며 압해인(押海人)이다.

오국진(吳國鎭)의 자는 맹화(孟華), 계미생이며 동복인(同福人)이다. 우의정(右議政) 오시수(吳始壽)의 현손이다.

강이중(姜履中)의 자는 용민(用民), 을유생이며 진주인이다. 대제학(大提學) 강유(姜愈)의 현손이다.

권기(權蘷)의 자는 요신(堯臣), 을유생이며 안동인(安東人)이다. 대제학(大提學) 권유(權愈)의 현손이다.

강이오(姜履五)의 자는 백휘(伯徽), 을유생이며 진주인이다. 교리(校理) 강침(姜忱)의 조카이다.

이명환(李鳴煥)의 자는 패겸(佩謙), 계사생이며 여흥인이다. 목재의 동생이다.

그중 정약용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郁郁星湖子(욱욱성호자)[찬란도 할사 성호 선생이시여]

誠明著炳文(성명저병문)[성과 명으로 찬란한 글 지었네]

瀰漫愁曠際(미만수광제)[아득해서 광막함을 근심하던 터에]

芒芴見纖分(황홀견섬분)[세밀히 분석한 것 보았네.]

眇末吾生晩(묘말오생만)[보잘것없는 나 늦게 태어났으나]

微茫大道聞(미망대도문)[아득한 대도를 들었네.]

幸能沾膏澤(행능점고택)[다행히 고택에 젖기는 했으나]

惜未睹星雲(석미도성운)[성운을 보지 못한 것 애석하네.]

寶藏饒遺馥(보장요유복)[보장엔 남긴 향기 가득하여]

仁恩實救焚(인은실구분)[인자와 은혜로 사람들 구제했네.]

典刑餘一老(전형여일노)[전형이 한 노인에게 남아 있어]

齒德迴千群(치덕회천군)[치덕이 뭇사람 초월했네.]

道喪窮年歎(도상궁년탄)[도학이 망한 것 무한히 탄식하더니]

朋來暮境欣(붕래모경흔)[벗 찾아오니 노경(老境)에 기뻐하네.]

校書酬耿結(교서주경결)[책 교정하며 서로의 마음 나누었고]

負芨喜辛勤(부급희신근)[스승 찾아 고생 달게 여기네.]

猶有安冥擿(유유안명적)[아직도 명적을 편안히 여겨]

徒然到白紛(도연도백분)[헛되이 백분에 이르렀네.]

勖哉良友輩(욱재양우배)[노력하는 친구들과]

於此送朝曛(어차송조훈)[여기서 아침저녁 보내었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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