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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01
한자 李勝宇淸德碑
이칭/별칭 이승우비(李勝宇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향산리 84-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승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41년 - 이승우 출생
건립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이승우 청덕비 건립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14년 - 이승우 사망
이전 시기/일시 1988년 - 이승우 청덕비 향산리 마을회관 옆으로 이전
현 소재지 이승우 청덕비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향산리 84-7 지도보기
원소재지 이승우 청덕비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향산리 276-3번지
성격 비석
양식 비좌개석
관련 인물 이승우
재질 화강석
크기(높이,너비,두께) 116㎝[높이]|45㎝[너비]|17㎝[두께]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향산리에 있는 이승우 관련 조선 후기 비석.

[개설]

이승우 청덕비는 조선 후기 문신 이승우(李勝宇)[1841~1914]의 공덕비이다. 이승우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도 홍주목사로서 변란이 일어난 지방에 파견한 임시 무관직 초토사(招討使)를 겸하였다.

[건립 경위]

1894년 9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때 아산 지역도 포함되는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대대적으로 기포(起包)[동학농민혁명 때 농민 등이 동학의 조직인 포(包)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하던 일]하여 내포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해 10월에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전투가 벌어졌으나, 관군과 일본군 등에 의해 실패하였다.

당시 홍주목사 겸 초토사로서 홍주성 방어와 진압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승우는 홍주성전투 이후 일본군, 유회군(儒會軍) 등과 함께 이듬해 초까지 전개한 농민군에 대한 추적과 체포, 토벌 과정에서 많은 수의 동학농민군을 처형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듬해인 1895년에 이승우내포 지역 곳곳에 자신의 공덕비를 세웠다고 전해지며, 그 수는 모두 8기라고 한다.

[위치]

이승우 청덕비(淸德碑)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향산리 84-7번지, 향산리 마을회관 옆에 있다. 원래는 현재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700m 지점의 향산리 용호원 길가에 있었으나, 1988년경에 도로 확장 공사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향산리 마을회관 옆으로 옮겼다. 마을회관 주변에서도 조금씩 두 차례 위치를 옮겨 지금의 자리에 자리 잡게 되었다.

[형태]

이승우 청덕비는 화강석으로 조성되었으며, 네모난 받침돌[비좌] 위에 몸돌[비신]을 세우고 지붕돌[개석]을 얹은 비좌개석 형태의 비석이다. 전면에만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은 높이 116㎝, 너비 45㎝, 두께 17㎝이다.

[금석문]

초토사이공승우청덕비(招討使李公勝宇淸德碑)

민안적파 성공공북 유범군중 위진격동 일편추월 인경함뢰 백리춘풍 호략홍공(民安賊破誠功拱北有范軍中威振擊東一片秋月隣境咸賴百里春風虎略鴻功)

[현황]

이승우 청덕비는 위치가 옮겨지기는 하였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2018년 기준 비석 외에 안내판이나 보호 시설 등 다른 구조물은 없다.

[의의와 평가]

이승우 청덕비내포 지방 동학농민군 진압을 공으로 여겨 공덕비 성격으로 곳곳에 세웠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이승우가 친일적 행태를 보여 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승우 청덕비동학농민혁명이라는 근대사의 커다란 사건과 관련하여 아산 지역에 드물게 남아 있는 유적이므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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