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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봉수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377
한자 牙山 烽燧制
이칭/별칭 봉수 제도,봉수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봉수제 폐지
개정 시기/일시 1438년 - 제주도 및 서남해안 봉수망 정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7년 - 봉수제 혁파하고 파발 도입 및 시행
관할 지역 연암산 봉수대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지도보기

[정의]

고려·조선 시대 아산 지역을 포함한 봉수대에서 횃불과 연기로써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수제(烽燧制)는 변경(邊境)이나 국경에서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 봉수대(烽燧臺)에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지방에서 중앙에 일방적으로 연락하는 통신방법이다. 일반적으로 횃불과 연기를 사용했지만,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찰 경우 봉수군(烽燧軍)이 다음 연락 장소까지 달려가서 상황을 전달하였다. 평상시에는 봉수를 하나 올리고, 바다나 국경에 적이 나타나면 두 개, 근처까지 오면 세 개,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 국경을 넘어 상륙하거나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개의 봉수를 올려 중앙에 연락을 하였다.

봉수대는 연변봉수(沿邊烽燧)와 내지봉수(內地烽燧)로 나뉘어졌는데, 연변봉수는 10~15리[약 4~6㎞] 간격으로 설치되었고, 내지봉수는 주수(晝燧) 지역은 20~30리[약 8~12㎞], 야화(夜火) 지역은 40~50리[약 16~20㎞] 간격으로 설치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경우 내지봉수에 속하였다. 충청남도의 내지봉수는 논산 강경산, 논산 황화산, 논산 노성산, 공주 월성산, 공주 고등산, 공주 쌍령산, 천안 대학산, 아산 연암산을 거쳐 경기도 평택의 망해산으로 연결되었다.

내지봉수에는 봉수군 15명과 오장(俉長) 5명이 근무하면서 봉수대를 관리하고 신호를 담당하였다. 봉수 신호는 고려와 조선이 조금 다른데, 고려시대에는 평상시 1거(擧), 위급할 때 2거, 긴급상황 발생시 3거, 초긴급 시 4거를 올렸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평상시 1거, 적이 보이면 2거, 가까이 접근하면 3거, 지경을 침범하면 4거, 우리 군과 접전하면 5거를 올렸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수도의 병조(兵曹)에 전달함과 동시에 변경 지역에도 알리기 위해 설치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연암산 봉수대는 세종 때 설치, 정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봉수제에 대해서는 『경국대전』 병전(兵典) 봉수조(烽燧條)에서, 아산 일대의 봉수제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아산현조(牙山縣條)」와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에서 찾을 수 있다.

[내용]

『경국대전』 병전 봉수조에 "봉화는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가까이 접근하면 셋, 지경을 침범하면 넷, 접전하면 다섯을 올리는데, 수도에서는 오원(五員)이 병조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이 진영 장수에게 보고한다. 목멱산[남산] 봉화대는 동쪽으로 제1대가 영안도(永安島)[함경도]와 강원도에서 오는 양주 차아산의 봉화를 받고, 제2대가 경상도에서 오는 광주(廣州) 천천령의 봉화를 받으며, 제3대가 평안도의 육로로부터 오는 모악산 동쪽 봉우리의 봉화를 받고, 제4대가 평안도·황해도의 해로로부터 오는 모악산 서쪽 봉우리의 봉화를 받으며, 제5대가 충청도·전라도에서 오는 양천 개화산의 봉화를 받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아산현조」에 "연암산 봉수는 남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대학산과 호응하고, 북쪽으로 직산현(稷山縣) 망해산과 호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정아주지』에 "연암산 봉수는 남쪽으로는 천안군 대학산에서 신호를 받는데, 서로의 거리는 30리[약 12㎞]이다. 북쪽으로는 직산현 망해산에 신호를 전하는데, 서로의 거리는 25리[약 10㎞]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봉수제는 가야 및 삼국시대에도 봉수를 활용한 기록이 있어 역사가 깊다. 법제화는 1149년(고려 의종 3)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曺晉若)의 건의로 되었다. 조선시대 봉수제는 고려시대 봉수제를 근간으로 세종 때 정비되었다. 봉수망(烽燧網)은 남쪽 해안, 북쪽 변경, 제주도 및 서남해안 순으로 정비되었는데,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1438년(세종 20) 제주도 및 서남해안 봉수망 정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봉수제임진왜란 때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운영상의 문제점을 보였다. 이에 선조는 1597년(선조 30) 봉수제를 혁파하고 군사통신 수단으로 파발(擺撥)을 도입하여 시행하였다. 이후 숙종 대에 봉수제가 부활하여 다시 시행되었고, 19세기 말까지 군사통신망으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개항 후 근대문물이 수입되어 근대적 통신시설인 전신전화가 설치되자 그 기능을 잃고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봉수제는 중요성에 비해 충실한 기능과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전근대 군사통신망의 일익을 담당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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