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812
한자 文章魯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최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6년연표보기 - 문장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3년 2월 - 문장로 동학 입도
활동 시기/일시 1894년 10월 29일 - 문장로 홍주성 전투 참가
활동 시기/일시 1894년 11월 16일 - 문장로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로 돌아옴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문장로 아들 문구석 사망
활동 시기/일시 1900년 - 문장로 태안 수접주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1월 - 문장로 광천으로 피신
활동 시기/일시 1902년 2월 10일 - 문장로 홍성군 홍동면 화신리 토굴에 은신
활동 시기/일시 1904년 2월 - 문장로 공주시 사곡면 연지동에 은거
활동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문장로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로 이거
몰년 시기/일시 1919년 9월연표보기 - 문장로 사망
거주|이주지 문장로 거주지 -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학교|수학지 문장로 이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 지도보기
묘소 문장로 묘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독립운동가|종교인
성별
대표 경력 동학 수접주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의병·독립운동가·종교인.

[개설]

문장로(文章魯)[1846~1919]는 북접 내포 지역 동학농민운동의 횃불을 밝혔던 방갈리 기포의 주역이었으며, 예산에 동학을 뿌리내리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였다.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아들로 문구석(文龜錫)과 문병석(文秉錫)이 있다.

[활동 사항]

문장로는 1893년 2월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서 상암 박희인을 통해 같은 동네에 살던 조운삼, 아들 문구석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였다. 적극적인 포덕 활동을 펼쳐 방갈리접주가 되었고, 기포령(起包令)에 의해 태안 관아에 구속되어 있던 동학 지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태안 관아를 습격하여 30여 명을 구출하였다.

문장로는 면천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 홍주성 전투에 태안 지역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으며, 1894년 10월 29일 홍주성 전투 패배 후 고향인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에 당도하여 농민군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관군의 체포령이 내려져 전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태안반도 일대 해안 토굴과 야산에 은신하였다. 계속되는 은신 생활 속에 추격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자 아들인 문구석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진해서 체포되어 1894년 11월 16일 태안에서 총살당하였다.

아들의 사망 이후 문장로는 1895년 태안군 이원면 만대정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을 피신시킨 쥐 소원면 소근리 철마산 산중에 토굴을 파고 8년 동안 은신하며 동학 조직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0년 동학 지도부들이 내린 조직 강화 밀명을 받고 태안 수접주가 되어, 조석헌·곽기풍·이광우 등과 함께 비밀리에 조직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1902년 1월 공주부의 이민직이 체포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색출 작전을 시작하자 문장로는 가족들과 함께 목선을 타고 안면도와 원산도를 거쳐 2월 9일 광천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홍성군 홍동면 화신리에 거주하던 김명수(金明洙)의 안내로 산중에 토굴 움막을 지어 은거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였다. 이후 신분이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1904년 2월 공주시 사곡면 연진동의 산중으로 피신하여 숯장수로 변신하고 토굴에 은거하였다.

문장로는 1910년 경술국치로 동학 관련자들에 대한 탄압이 느슨해지자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로 이거하여 불모지를 개간하고 천도교 포덕 활동을 하다가 1919년 9월 사망하였다.

[묘소]

문장로의 묘소는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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