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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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潊 |
영어공식명칭 | Lee Seo |
이칭/별칭 | 징지(徵之),옥동(玉洞),옥금산인(玉琴散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출생 시기/일시 | 1662년 - 이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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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23년 - 이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3년 - 이서 문인들이 사시(私諡)를 의논하여 홍도선생(弘道先生)이라 함 |
출생지 | 이서 출생지 - 서울특별시 정동 |
거주|이주지 | 이서 거주지 -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
성격 | 실학자|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여주 |
대표 관직|경력 | 찰방 |
[정의]
조선 후기 예산에서 활동한 서예 이론가이자 학자.
[가계]
이서(李漵)[1662~1723]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징지(徵之), 호는 옥동(玉洞) 또는 옥금산인(玉琴散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이상의(李尙毅), 할아버지는 사헌부지평을 지낸 이지안(李志安)이다.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이하진(李夏鎭)이며, 어머니는 이후산(李後山) 딸 용인이씨(龍仁李氏)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이복 형이다. 열 살 때 숙부 이주진(李周鎭)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이서는 1662년(현종 3) 서울 정동에서 이하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잠시 덕산[현 예산군 고덕면]의 숙부 이명진에게 나가 살았으며, 열 살 때부터는 숙부 이주진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거주하였다. 아버지 이하진과 둘째 형 이잠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촌에서 은거하였다. 이서는 지속적으로 예산 지역과 인연을 이어갔는데 동생인 이침(李沈)이 덕산에 거주하던 숙부 이명진의 양자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침의 자손들이 제자로서 이서의 서법을 전수받아 예산의 여주이씨 가풍으로 동국진체를 전파하였다. 사후에 이서는 서도(書圖)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서예 이론가이자, 성호 이익과 예산에 거주하던 이하진의 자손들에게 여주이씨 가문의 실학적 학풍을 이어 준 학자로 평가받았다.
[학문과 저술]
이서는 조선 시대 최초의 서예 이론서인 『필결(筆訣)』을 저술하여 서예가 학문적으로 확립되는 데 기여하였으며, 영·정조 시대 조선의 특색을 잘 담아낸 동국진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동국진체는 이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백하(白下) 윤순(尹淳)을 거쳐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에 의해 완성되었다. 저술로는 문집인 『홍도유고(弘道遺稿)』가 있다.
[묘소]
이서의 묘는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 있었는데 여주이씨 후손이 강원도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723년 문인들이 사시(私諡)[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선비이나 지위가 낮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지 아니할 때, 친척이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를 의논하여 홍도선생(弘道先生)이라 정하였다. 이서가 만들어 연주하던 거문고인 옥동금(玉洞琴)이 현존하여 경기도 안산의 성호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