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624
한자 崔承立旌閭
이칭/별칭 효자 최승립 정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충절로 2454-6[노전리 30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59년연표보기 - 최승립 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52년 - 최승립 정려 명정 현판을 다시 만들고 정려기를 게재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6년 - 최승립 정려 중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6년 - 최승립 정려 내부에 효자비 건립
현 소재지 최승립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충절로 2454-6[노전리 302]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노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최승립의 정려.

[개설]

최승립 정려는 조선 후기의 효자 최승립(崔承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최승립대흥군 사람으로 최영충(崔永忠)의 아들이다. 한겨울에도 뱀과 잉어를 잡아 부모의 병을 돌보아 1659년(효종 10) 효자 명정을 받았다. 서달공(西達公)의 묘 아래에 정려를 세웠다. 최승립 정려는 중수를 거듭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최승립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품앗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중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자 뱀을 약으로 쓰면 좋다는 말을 듣고 뱀을 찾으러 떠난다. 엄동설한이라 뱀을 찾을 길이 없었지만 천지신명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니 갑자기 뱀이 나타나 잡아 달여 먹이자 차도가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병에는 잉어가 명약이란 말을 듣고 한겨울에 연못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자 얼음이 녹고 잉어가 튀어올랐고, 잉어를 잡아 약으로 써 아버지의 병도 나았다. 최승립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조정에서도 최승립에게 효자 명정을 내렸다. 1655년(효종 6)부터 1788년(정조 12)까지 예조에서 효행등제단자를 모아 엮은 『효행등제등록(孝行等第謄錄)』에 따르면 1659년 윤3월 효자정문질의 기록 가운데 대흥군 ‘고학생 최승립’이 기록되어 있어 이때 최승립이 명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최승립 정려예산군 광시면 소재지 서쪽으로 2㎞ 정도 이동한 후 원노전에서 노전으로 향하는 옛길 남쪽에 있다.

[변천]

정려가 처음 건립된 곳은 서달공의 묘 아래였으나 정려가 중수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선대조의 원거지였던 청양의 농지로 이건하여 200여 년간 자리를 지켰다. 다시 한 번의 중수를 거치며 현재 원노전마을 입구로 이건하였다. 1952년 후손인 최종철(崔鍾喆)에 의하여 명정 현판을 다시 만들고 정려기를 게재하였다. 1966년 다시 정려를 중수하고 정려 내부에 최승립 효자비를 세웠다.

[형태]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에 팔작지붕 양식이다. 시멘트로 낮게 기단을 조성한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팔각기둥을 세우고 사면의 하방 위에는 홍살을 돌렸다. 정려의 오른쪽 상단에는 1952년 쓰여진 명정 현판이 걸려 있으며 왼쪽 상단에는 정려기가 걸려 있다.

명정 현판에는 1952년 최종철이 중건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효자 통덕랑 탐진 최승립지려(孝子通德郞耽津崔承立之閭)’가 쓰여 있다. 정려기에는 후손 최동원(崔東源)이 지었으며 최승립의 행적과 남루해진 정려를 중건하여 다시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부 바닥 중앙에는 1966년 세운 효자비가 있는데, 중앙에 ‘효자 통덕랑 탐진 최승립지려(孝子通德郞耽津崔承立之閭)’라고 쓰여 있으며 좌우로 4자 2열 6연의 최승립을 기리는 시구가 쓰여 있다. 비의 왼쪽에 찬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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