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22 |
---|---|
한자 | 金載讓妻鐵原林氏旌閭 |
이칭/별칭 | 열녀 철원임씨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797년 - 김재양 처 철원임씨 정려 건립 |
---|---|
현 소재지 | 김재양 처 철원임씨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 |
원소재지 | 김재양 처 철원임씨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평촌리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원임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
[개설]
철원임씨(鐵原林氏)[?~1794]는 남편 연안김씨(延安金氏) 김재양(金載讓)[?~1794]이 신혼 초 병에 걸리자 탕약을 직접 맛보아 달이고, 5년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한결같이 간호하였다. 철원임씨의 정성에도 김재양이 병석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세상에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철원임씨의 마음을 눈치채고 집안에서는 불의의 일에 대비하여 고복(皐復) 중에는 철원임씨의 몸을 뒤져 칼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시가의 철저한 감시 속에 뜻을 이룰 수 없었던 철원임씨는 이때부터 언행을 비롯하여 잠을 자거나 먹는 일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며, 집안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체기가 있다며 밥을 삼키지 못하였다. 철원임씨는 남편 김재양의 관 앞에 곡을 하고, 자리를 마루 동쪽으로 옮겨 대뜸 담배를 피운 후 자기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고 한다. 그런데 정신과 기력이 괴로워 보여 집안사람들이 약을 입으로 흘려 넣었으나 끝내 삼키지 않으니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남은 담배를 가져다 살펴보았는데, 그 안에 거미 같은 형상의 물체가 있었다고 한다. 철원임씨가 사망하자 집안사람들은 철원임씨가 끝내 독으로 자해하여 목숨을 끊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위치]
김재양 처 철원임씨 정려는 예산군 덕산면 소재지에서 국도45호선을 따라 예산 쪽으로 3㎞ 정도 떨어진 상하리 1구 마을 입구 도로변에 남향하여 있다. 상하리에는 연안김씨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변천]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 1구에 세워진 김재양의 처 철원임씨 정려는 철원임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796년(정조 20)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정려 건립과 관련하여 『일성록(日省錄)』 1795년 윤2월 19일 기사에 “덕산의 유학자인 이언복(李彥復) 등이 본현(本縣) 김재양 의 처 임씨 의 열행이 뛰어나니 정문을 세우는 은전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1796년 1월 28일 상언을 받아들여 거행하도록 하였으므로 철원임씨 열녀 정문이 1796년 명정을 받아 건립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별단(別單)으로 작성된 『일성록』1796년 기사에 철원임씨의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효행등제등록(孝行等第謄錄)』 「열녀정려질(烈女旌閭秩)」에도 ‘덕산 고사인 김재양 처 임씨(德山故士人金載讓妻林氏)’라고 임씨의 명정 기록이 남아 있다.
김재양 처 철원임씨 정려는 본래 삽교읍 평촌리 정문들에 있던 것을 삽교읍 상하리 1구에 옮겨 온 것으로, 옛 정려의 약 3m 앞에 새로운 정려를 2015년 다시 건립하였다.
[형태]
옛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양식이며, 시멘트 기단 위에 시멘트로 만든 원기둥을 올리고 있다. 좌우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으며, 정려의 4면에는 철재 홍살을 두르고 있다. 옛 정려 앞에는 1992년 예산 지역 유림 및 선현유적보존회에서 세운 열녀철원임씨중수기적비(烈女鐵原任氏重修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새롭게 건립한 정려는 옛 정려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 건립하였으나, 4면에 두른 홍살을 비롯한 전체적인 소재를 목재로 하였다. 정려 내부 중앙 상단에는 ‘열녀 학생 연안 김재양 처 유인 철원임씨지문 상지이십일년 정사 정월 일 명정(烈女學生延安金載讓妻孺人鐵原林氏之門 上之二十一年丁巳正月 日 命旌)’이라고 쓰인 1796년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정려 왼쪽 상단에는 1957년 5대손 김현기(金玄基)가 지은 정려기가 걸려 있는데, 정려의 건립 이유를 비롯하여 철원임씨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현황]
예산군 삽교읍과 덕산면, 대흥면 일대에는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였던 김제남(金悌男)[1562~1613]이 처형되면서 많은 후손들이 피난하여 정착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김자지(金自知)[1367~1435]의 후손들로, 삽교읍에서는 목리를 비롯하여 수촌리, 삽교리 일대에 많이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