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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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見龍妻牛峰李氏旌閭 |
이칭/별칭 | 열녀 우봉이씨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운로 401-31[봉림리 25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02년 - 정현룡 처 우봉이씨 정려 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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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정현룡 처 우봉 이씨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운로 401-31[봉림리 255] |
성격 | 정려 |
양식 | 납도리식|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에 있는 조선 후기 정현룡 처 우봉이씨의 열녀 정려.
[개설]
정현룡 처 우봉이씨 정려는 정현룡(鄭見龍)[1547~1600] 처 우봉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현룡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무신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예산 인물조에 의하면, 우봉이씨는 남편 정현룡이 함경도강계판관으로 부임하여 20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였다. 우봉이씨는 대를 이은 자손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려 남편이 있는 함경도로 갔다. 그러나 정현룡이 법도에 따라 되돌아가라고 하자 하는 수 없이 돌아오면서 마천령에서 읊은 시를 남편에게 전하였다. 속치마폭에 쓴 아내의 시를 받은 정현룡은 왕의 허락을 받고 온 것을 알고 우봉이씨를 다시 불렀다고 한다. 1600년(선조 33) 왜란 때 남편이 전사하고 남편의 애마가 머리[頭部]만 물고 돌아오자 우봉이씨는 선영(先塋)인 봉산면 옥전리에 장례를 치르고 일생 동안 소복하고는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위치]
정현룡 처 우봉이씨 정려는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성지마을 안쪽으로 뻗은 구릉 하단부 정대영 가옥 앞에 있다.
[변천]
우봉이씨의 정려가 언제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나 우봉이씨 명정 현판에 ‘상지즉위 이년 임술(上之卽位二年壬戌)’에 중수되었다고 쓰여 있다. 정현룡 처 우봉이씨 정려는 1802년(순조 2)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정현룡 처 우봉이씨 정려는 정면1칸, 측면 1칸에 납도리식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4면은 홍살을 돌려 세우고 정려의 뒷면은 시멘트 고맥이를 한 다음 중방과 창방 사이에 홍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양옆 박공 아래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1802년 중수하였음을 기록한 ‘열녀선무일등공신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정헌대부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 정현룡 처 정경부인 이씨지문(烈女宣武一等功臣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行正憲大夫咸鏡北道兵馬節度使兼鏡城都護府使鄭見龍妻貞敬夫人李氏之門)’이라고 쓰인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현황]
정현룡 처 우봉이씨 정려 바로 뒤편으로 정현룡 일가가 거주하였던 정대영 가옥이 있다.
[의의와 평가]
우봉이씨의 남편 정현룡은 뛰어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수차례 공을 세운 장군이다. 현종 때 정현룡의 녹훈이 이루어졌을 때 우봉이씨의 열녀 명정도 함께 내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정려를 받은 우봉이씨는 전란 중에도 유교적 윤리를 따른 인물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