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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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熙績朴基宅旌閭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862년 - 박희적·박기택 명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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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878년 - 박희적·박기택 정려 중수 |
현 소재지 | 박희적·박기택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박희적·박기택의 정려.
[개설]
박희적·박기택 정려는 박희적(朴熙積)[1686~1762]과 손자 박기택(朴基宅)[1765~1827]의 효행을 기려 1862년(철종 13) 명정을 내려 건립한 정려이다. 박희적은 본관이 밀양(密陽), 자는 명호(明皞)이다. 순천장씨 장계찬(張啓贊)의 딸과 혼인하였고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하였고,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똥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며,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약으로 달여 먹이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끝내 죽자 역시 3년간 시묘를 살았다. 국상 때에는 단을 만들어 곡을 하고 3년간 묘막에서 살았다고 한다. 사후 100년이 지난 1862년 효자 명정과 통훈대부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다.
박기택은 박희적의 손자로, 자는 여원(汝元)이다. 박건환(朴健煥)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박건환의 동생 박맹환(朴孟煥)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부인은 울진장씨 장성찬(張聖贊)의 딸이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해 행적이 널리 알려졌고, 박희적과 함께 1862년 효자 명정을 받았다.
[위치]
예산군 고덕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지방도609호선을 따라 약 1.5㎞ 들어가면 도로 왼쪽으로 하평교가 있다. 하평교를 건너 약 5㎞ 가서 봉산초등학교를 지나면 서쪽으로 고도리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고도리 마을회관에서 북쪽 고갯길에 박희적·박기택 정려가 있다.
[변천]
고도리는 밀양박씨 공간공파(恭簡公派) 자손들이 다수 거주하는 마을로 밀양박씨의 입향은 1600년대 박효성(朴孝成)이 입향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박효성의 묘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에 있는데, 마을 뒤쪽의 봉명산 고개를 경계로 고도리와 접하고 있다. 박효성의 입향 이유는 전하지 않는다. 박효성의 손자였던 박희적은 손자 박기택과 함께 효행이 있어 유림의 칭송을 받았으며, 박기택이 죽은 지 35년 만인 1862년 효자 명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박희적과 박기택 정려는 박희적의 명정 현판에 ‘상지 14년 무인(上之14年 戊寅)’에 개간(改刊)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878년(고종 15)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형태]
박희적·박기택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정려의 4면은 홍살이고 양옆의 박공 아래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정려 주변에는 낮은 시멘트 담이 둘러져 있다. 정려 내부에는 1862년 내려진 ‘효자 학생 밀양박기택지려(孝子學生密陽朴基宅之閭)’ 명정 현판과 1878년 중수하였다는 ‘효자 증 통훈대부 사복사정 밀양박희적지려(孝子贈通訓大夫司僕寺正密陽朴熙績之閭)’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박희적의 명정 현판 뒤에는 진사 이돈(李敦)이 쓴 ‘박씨양세정려기(朴氏兩世旌閭記)’ 현판이 있다.
[의의와 평가]
박희적의 묘소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 선영에 있으며, 박기택의 묘소는 충청남도 청양군 동하면 무출동에 있다. 박기택의 아들 박만진(朴萬鎭)[1795~1856]이 쓴 박희적의 행장을 보면 박희적이 마을에서 손꼽히는 재력가였음을 알 수 있다. 박희적은 덕산향교 중수를 위해 자기 재산을 내었고, 춘추 제향에 필요한 재물을 얻을 수 있도록 대야면 화전평 5두락의 땅을 향교에 기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박만진의 활동이 고도리 밀양박씨 집안 내에서 효자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려 건립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박희적·박기택 정려는 지역 내에서 밀양박씨들의 사족 활동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