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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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希孫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까치골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이전 시기/일시 | 1979년 - 이희손묘와 신도비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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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497년 - 이희손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66년 - 이희손 사망 |
현 소재지 | 이희손 신도비 -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까치골 |
원소재지 | 이희손 신도비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
성격 | 신도비 |
양식 | 호패형|복련형 문양 |
관련 인물 | 이희손 |
재질 | 돌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58㎝[비신 높이]|60㎝[비신 너비]|14.5㎝[비신 두께]|102㎝[비좌 너비]|45㎝[비좌 높이]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전주이씨 묘역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이희손의 신도비.
[개설]
이희손 신도비는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에 이희손의 묘와 함께 있다.
이희손(李希孫)[1497~1566]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망(公望)이다. 양녕대군의 현손으로, 이희손의 아버지는 보안정(保安正) 이수남(李壽南)이고, 어머니는 노공저(盧公著)의 딸 교하노씨(交河盧氏)이다. 이희손이 1555년(명종 10) 광주목사로 부임한 해 왜구가 남해안에 침입하여 강진현을 지키게 되었다. 그때 소속된 병사들이 싸움에는 겁을 내고 민가를 노략질하여 이희손이 책임을 지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1556년(명종 11) 왜구가 제주도를 침략하자 왜구에 맞서 공을 세우면서 유배에서 풀려나 복직되었다. 이후 오위장, 첨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66년(명종 21) 사망하였고 9월 15일 금천(衿川) 삼성산선영 옆 언덕에 장례하였다고 전한다.
[건립 경위]
이희손의 묘와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것을 1979년 후손들이 전주이씨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로 옮겼다. 평촌리는 이희손의 손자인 이만의 사전[사패지]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이만의 묘와 신도비를 비롯해 전주이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위치]
이희손 신도비는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까치골에 있다.
[형태]
이희손 신도비의 비석은 호패형으로 되어 있고, 비좌에 복련형 문양이 새겨져 있다. 비신은 너비 60㎝, 두께 14.5㎝, 높이 158㎝이며, 비좌는 너비 102㎝, 높이 45㎝이다. 이희손의 신도비는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비석 표면이 심하게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금석문]
이희손 신도비는 앞면에 ‘첨지중추부사이공희손지비(僉知中樞府事李公希孫之碑)’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