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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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義培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명산로 99-43[봉림리 산5-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644년 - 이의배신도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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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76년 - 이의배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이의배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05월 17일 - 이의배신도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이의배신도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이의배신도비 -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명산로 99-43[봉림리 산5-1] |
성격 | 신도비 |
양식 | 장방형 대좌|쌍룡쟁주형 문양 이수 |
관련 인물 | 이의배|최석정|조맹부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322㎝[전체 높이]|247㎝[비신 높이]|104㎝[비신 폭]|43㎝[비신 두께] |
관리자 | 예산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이의배의 신도비.
[개설]
이의배신도비는 세워진 조선 후기의 문신 이의배(李義培)[1576~1637]의 신도비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이의배신도비는 1644년(인조 22)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찬하고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위치]
이의배신도비는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재동마을 야산의 남동향 경사면 구릉 중간에 있다.
[형태]
이의배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된 장방형의 대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방형의 화강암으로 된 쌍룡쟁주형 문양의 이수를 올렸다. 비의 총 높이는 322㎝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104㎝, 두께 43㎝, 높이 247㎝이다. 이수는 앞쪽보다 측면이 약간 비신 쪽으로 내려왔으며 비교적 세밀한 문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금석문]
이의배신도비는 앞면에 ‘공청절도사 한천군 증영의정 시충장 이공의배 신도비명 병서(公淸節度使韓川君贈領義政諡忠將李公義培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다. 신도비에 따르면 이의배는 단아하며 장엄하고 무게가 있는 풍채와 모습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검소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여 『논어』를 500번 읽었다고 한다. 또한 상소를 올릴 때도 부하에게 붓을 잡게 하고는 글을 불러 주는데 말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문리도 정확하고 통창(通暢)하니 문무를 모두 겸비한 무신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이의배의 손자인 한흥공(韓興公) 이여발(李汝發)이 병란을 피해 섬에 있다가 패전 소식을 듣고 서숙(庶叔) 이간(李稈), 당숙 이육(李稑)과 함께 쌍령의 싸움터로 갔다. 전쟁터에서 이의배의 시신을 찾았는데 전란으로 어지러워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1개월 뒤 조축생의 아내가 싸움터에 가서 우연히 이의배의 시신을 찾았는데, 쑥을 끌어다 덮고 목패(木牌)에 써서 표시한 다음 돌아와 한흥공에게 알렸다. 이의배의 시신은 발견 당시 얼굴과 수염, 머리털은 손상된 데가 없고 왼쪽 배 아래와 겨드랑이 사이에 각각 화살 하나씩 맞았는데, 옷과 갑옷은 다 벗겨 가고 다리 아래에 흰 명주 행전(行纏)과 푸른 비단 끈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황]
이의배신도비는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