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600568
한자 李山海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19년연표보기 - 이산해 신도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39년 - 이산해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09년 - 이산해 사망
현 소재지 이산해 신도비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319-50[방산리 산7-1]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관련 인물 이산해|채제공|한호|허목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82㎝[비신 높이]|74㎝[비신 폭]|30㎝[비신 두께]|38㎝[대좌 높이]|137㎝[대좌 가로]|97㎝[대좌 세로]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산해의 신도비.

[개설]

이산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문신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신도비와 이산해의 사당과 묘소가 갖추어져 있다.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이장윤(李長潤)이며, 할아버지는 판관 이치(李穉)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다. 작은아버지가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쓴 이지함(李之菡)이다. 이산해는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거치고 1600년(선조 33) 영의정을 지냈다. 북인의 영수였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었다. 서화(書畵)에 능하여 문장팔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이산해가 쓴 책으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건립 경위]

이산해 신도비이산해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819년(순조 19) 10월 세워졌다.

[위치]

예산군 대술면 소재지 북동 방면으로 제방을 따라 약 3.5㎞ 이동하여 방산저수지 방향으로 가다가, 길을 따라 약 3㎞ 더 가면 방산저수지 북쪽에 있는 음지말에 이른다. 이산해 신도비방산저수지 상단부 구릉에 있다.

[형태]

이산해 신도비는 정면 1칸, 측면 각 1칸의 신도비각으로 신도비를 보호하고 있다. 장방형 대좌는 가로 137㎝, 세로 97㎝, 높이 38㎝이다. 화강암으로 깎은 비신은 폭 74㎝, 두께 30㎝, 높이 182㎝이다. 비신 위에 옥개형 이수를 올렸다.

[금석문]

이산해의 8대손 이정명(李鼎溟)의 부탁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인당원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이산해 신도비문을 썼다. 한호(韓護)[1543~1605]의 서체로 새기고 허목(許穆)이 전(篆)하였다. 신도비는 해서체로 ‘유명조선광국 평난공신 영의정 아성부원군 시문란 이공 신도비(有明朝鮮光國平難功臣領議政鵞城府院君諡文籣李公神道碑)’라고 쓰고 이산해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산해 신도비를 통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신 이산해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비석은 당대 대가들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문화재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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