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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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興邑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169|예산군 대흥면 의좋은 형제길 33[동서리 106-1] |
집필자 | 성부제 |
소재지 | 대흥읍성 터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169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 형제길 33[동서리 1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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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또는 상중리에 있었던 대흥읍성의 터.
[개설]
대흥읍성 터는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또는 상중리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흥읍성의 터이다. 읍성은 전근대 시기 지방의 치소 즉 행정 사무를 맡아 보는 기관이 있는 곳을 둘러쌓은 성 혹은 치소가 위치한 성을 가리킨다. 읍성은 치소가 위치한 성이므로 행정적·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성내에 주민들이 거주하기도 하였으며, 유사시 주민들의 입보처로 기능하였다. 성에는 동헌(東軒)·객사(客舍)·작청(作廳) 등 행정을 담당하는 관아 시설이 있었고, 또한 각종 창고들도 있었다.
읍성 건립은 고려 말을 거쳐 조선 성종 대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약 330개의 행정구역 중 190개가 읍성이었다고 한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읍성 철거령이 내려지면서 대부분의 읍성들은 철거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가 있었다. 읍성은 부(府)·목(牧)·군(郡)·현의 행정구역 단위의 등급에 따라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규모는 일정하지는 않으나 이런 차이는 주민의 수효와 관계되었으며, 큰 것은 3,000척(尺)[1척은 30㎝] 이상, 중간 규모는 1,500~3,000척, 작은 것은 1,000척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남부 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예산군에는 덕산, 예산, 대흥 세 고을에 읍성이 있었는데 덕산 대흥읍성은 문헌 기록이 남아 있으나 예산읍성은 문헌 기록이 없다.
[변천]
대흥읍성과 관련한 기록은 각종 지리지와 읍지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가장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읍석성이라고 하여 “둘레가 244보인데, 안에 우물이나 샘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대흥현 성곽조에도 읍성과 관련하여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115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와 1681년(숙종 7)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대흥군읍지』에도 같은 기록이 남아 있어 대흥읍성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위치]
대흥읍성에 관한 두 가지 견해 중 상중리 읍성터 는 대흥면 소재지에서 대흥 중고등학교 남쪽 임존성길을 따라 500m 정도 봉수산휴양림으로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상중천이 흐른다. 상중천 바로 건너 남쪽으로 작은 둔덕을 발록재, 관록재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대흥읍성 터라고 본다. 다른 곳은 현재 대흥동헌이 있는 자리와 대흥면행정복지센터, 대흥초등학교 부근 일대라고 추정한다.
[현황]
대흥읍성의 흔적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을 찾기 어려워 터만 추정하고 있다. 대흥읍성 터도 현재 상중리 읍성터와 동서리 읍성터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상중리 읍성이라는 견해에 대해 살펴보면 심정보 등이 1990년경 조사한 바로는 토성터와 문지가 조사된 것으로 보아 민보성의 가능을 갖춘 성터의 흔적이 198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조사 당시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고 밭으로 평탄 작업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중천이 북쪽 지형을 침식하여 자연적인 성벽 구실을 하였고, 서쪽도 지형적으로 높아 자연스레 흙을 어느 정도 쌓으면 성벽 구실을 할 수 있는 지형이다. 민가가 들어서며 농로를 내느라 낮추어졌고 민가를 지으며 파헤쳐졌다. 조사가 진척된 후에도 사진 자료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동서리 읍성이라는 견해에 대해 살펴보면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의하면 대흥읍성은 길이 1,150척[약 350m]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물이 하나 있었으나 못쓰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현재 대흥읍성의 정확한 자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동헌은 현 위치, 아문은 대흥초등학교 정원 자리, 객사는 대흥초등학교 현 건물 자리이고 객사의 동쪽에 연못이 있었고, 연못 가운데 포정정이 있었다. 읍성 안에 건물들이 들어와 있었다고 보면, 북쪽은 동서천을 경계로 현 대흥초등학교 교사 자리와 면사무소 일대를 포함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대흥은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임존성이 있는 역사적 지역이고 조선 18대 현종 태실이 있어 승군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읍치였지만 대흥읍성은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또한 의좋은형제공원 등을 조성하면서도 부근에 대한 정밀 지표 조사나 발굴 조사 하나 없이 진행되어 읍치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가 없다. 현재 대흥동헌 뒤편이나 대흥면행정복지센터 뒤편은 농경지라 발굴 조사를 할 수도 있지만 도로 포장 공사가 되었다. 1995년 있던 돌담장도 많이 발출되었는데 앞으로 발굴 조사를 통한 읍성을 복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