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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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靑年團 |
영어공식명칭 | Daehancheongnyeond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규 |
최초 설립지 | 대한청년단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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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우익 청년 단체 |
[정의]
6·25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지역에 있었던 청년 단체.
[개설]
해방 후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철원은 북한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둔 뒤 북진하던 국군이 10월 10일 철원군 철원읍에 진주하자 열성 공산당원들의 간섭과 핍박에 시달렸던 철원 주민들과 대한청년단원들은 국군을 환영하며 자율적으로 반공 및 마을 치안유지 활동에 나섰다.
[설립 목적]
대한청년단은 반공 활동 및 국군을 도와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변천]
6·25전쟁 발발 후 철원 주민들은 자율적으로 ‘전시대책위원회’라는 자치 치안대를 읍면 단위로 조직하였고 그 산하에 ‘대한청년단’이 읍·면·리 단위로 있었다.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대한청년단원들은 주로 해방 직후 철원에서 반공 활동을 하였던 신한청년회 출신들이었다. 1950년 11월 8일 국군이 후퇴하자 장흥리 대한청년단원들과 주민들도 같이 포천으로 남하하였다가 다시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11월 16일 마을로 돌아왔다. 1950년 11월 23일 새벽 1개 소대의 인민군이 장흥리 마을을 포위하며 쳐들어오자 대한청년단원들과 주민들은 총을 들고 나가 맞섰고 장흥리 장방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대한청년단원들은 인민군 17명을 사살하고 1명은 생포하였으며 무기 20점을 노획하였으나 퇴로가 막혀 후퇴하지 못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체포되어 총살당하거나 옥사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반공 및 치안유지 활동을 펼쳤던 대한청년단의 고문은 서기훈 장흥교회 목사, 대책위원장은 박상춘, 부위원장은 정국환, 의용경찰대장은 고재영, 조사계장은 김종철, 철원군위원장은 유득신이었다. 대원으로는 구승현, 김기만, 김금순, 김대길, 김대식, 김봉조, 김영택, 김운선, 김윤성, 김선필, 김춘성, 김해중, 박일용, 송광식, 유풍영, 이수봉, 이종근, 이현우, 허경만, 허경태, 현용대, 홍변연 등이 있었다. 대한청년단 고문이었던 서기훈 목사는 마을 청년들이 열성 조선노동당원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려 하자 ‘원수까지 사랑하라’며 청년들에게 호소하여 풀어 주었다. 서기훈 목사는 전세가 역전되어 마을이 다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1950년 12월 31일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가 1951년 1월 8일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암소고개에서 70세 나이로 총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1967년 3월 13일 장흥리 마을 사람들과 장흥교회 교인들이 예배당 옆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추모예배를 올리고 있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맞서며 마을의 치안 유지에 자발적으로 앞장섰던 대한청년단원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분단이 낳은 비극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