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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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津浦戰鬪 |
영어공식명칭 | The Battle of Deok-jin port |
이칭/별칭 | 나주해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 |
집필자 | 이재범 |
[정의]
912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덕진포 일대에서 벌어진 태봉과 후백제의 전투.
[개설]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덕진포 일대는 태봉과 후백제 사이의 패권을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당시에는 나주에 속하였다. 덕진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태봉이 승리함으로써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이후 태봉은 내륙에서도 후백제와 신라를 더욱 압박하여 삼한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하였다.
[역사적 배경]
903년(궁예 3)에 있었던 궁예의 나주전투 승리로 덕진포 일대는 덕진포 전투가 일어난 912년경에는 태봉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905년에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다음부터 상주 일대를 공격하여 신라 침공을 시작하였다. 덕진포 전투의 원인에 대하여 사서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고려사(高麗史)』에는 “왕건은 궁예가 나날이 포악해지는 것을 피하고자 하여 909년에 궁예의 동의를 얻어 서남해안으로 향하였다.”라고만 전하고 있다. 이때의 출정으로 왕건은 광주 염해현[지금의 전라북도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추정]에 있다가 후백제에서 오월국(吳越國)으로 보내는 사신선을 나포하여 돌아왔다.
[경과]
궁예는 돌아온 왕건에게 다시 정주에서 전함들을 수리하게 한 후 군사 2,500명을 인솔하고 서남해 공격을 명령하였다. 왕건은 진도군(珍島郡)을 함락하고 고이도(皐夷島)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912년에 궁예는 친정(親征)을 결정하였다. 궁예의 친정에 대하여 사서에는 기록이 없으나 강진 무위사에 있는 선각대사비의 분석 결과 알 수 있었다. 왕건도 전함을 이끌고 나주 포구에 이르러 후백제의 군사와 대치하였다. 후백제 군대는 수군과 육군이 종횡으로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포진하고 있었다. 목포는 현재의 영산포로 추정되며, 덕진포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영암군 덕진면, 무안군 몽탄면 등 여러 설이 있다.
후백제 군대 규모가 성대하였지만 왕건의 군대가 곧 진군하여 공격하니 후백제의 적선들이 퇴각하였고,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을 하니 후백제 군사들이 불에 타고 익사한 자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
[결과]
궁예의 친정에 의한 이 전투에서 왕건 휘하의 군사들은 견훤의 군사 500여 급을 베었다고 한다.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고, 고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 지역 설화에 따르면, 무안의 몽탄 서쪽에 파군교(破軍橋)가 있는데, 이 지역에서 왕건의 군대가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시대 덕진포를 지금의 무안군 몽탄면 덕암리에 비정한다면, 후백제군의 전함들은 덕진포 쪽에, 고려군의 전함들은 몽탄대교 인근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덕진포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903년 이래로 점령하였던 나주 관내 여러 군현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뒤로도 서남해안에서 제해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덕진포해전으로 태봉은 서남해안의 세력을 장악하였으며, 실질적으로 당시의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현은 덕진포해전으로 궁예는 삼한의 3분의 2를 점령하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덕진포해전의 결과로 얻어진 서남해의 제해권은 왕건이 왕이 된 다음 일시적으로 불통되었으나 후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왕건은 덕진포해전을 통하여 영암의 최지몽, 나주의 오다련과 같은 전라남도 지역 세력들과 연계를 갖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