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온천북탕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375
한자 溫陽溫泉北湯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승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660년연표보기 - 「온양온천북탕기」 저술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소장처 고려대학교 도서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소장처 연세대학교 도서관[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연희동 25] 연세대학교
성격 기문(記文)
저자 남구만
편자 남학명[아들]
간행자 남처관[손자]
권책 『약천집』 34권 17책 중 28권에 수록
행자 10행 20자
규격 14.8㎝[가로]|21.6㎝[세로]

[정의]

조선 후기 문신 남구만이 지은 충청남도 아산현온양온천에 대한 기문(記文).

[개설]

「온양온천북탕기(溫陽溫泉北湯記)」는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1660년 가을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남도 아산현 온양군의 온탕에 갔다가 퇴락한 온천을 수리하고 보수한 내용에 관한 기록이다.

[저자]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숙종 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좌윤이 되었으며, 1679년 윤휴(尹鑴)·허견(許堅)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대사간·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687년(숙종 13) 영의정에 올랐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정세에 따라 파직과 서용을 거듭하다 1707년(숙종 33)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다.

[편찬/간행 경위]

「온양온천북탕기」는 남구만이 1660년 가을에 어머니를 모시고 온양군의 온탕에 갔을 때 황폐해진 북탕(北湯)을 보수하고 지은 작품이다. 이후 남구만의 아들인 남학명(南鶴鳴)이 문집을 산정하면서 수록하고, 남구만의 손자 남처관(南處寬)이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온양온천북탕기」가 수록된 『약천집(藥泉集)』은 34권 17책의 활자본으로, 매면 10행 20자, 크기는 가로 14.8㎝, 세로 21.6㎝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온양온천북탕기」는 『약천집』의 28권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남구만은 1660년 가을 어머니의 두풍(頭風)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온천에 가게 되었다. 「온양온천북탕기」의 기록에 따르면, 온천은 세월의 흐름 속에 방치되어 "깨진 기와 조각과 자갈이 우물 속에 가득 차 있고 풀뿌리가 우물가를 빙 둘러싸고 있어서 황폐하고 질척거리는" 지경이었으며, 악창(惡瘡)을 앓는 자가 와서 함부로 목욕한 이후 선왕(先王)의 유풍은 사라진 후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직접 목격한 남구만은 온천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성왕으로, 다시 성왕에서 백성으로 이어지는 은택과 덕화의 매개체임을 강조하면서, 이를 회복하여 성왕의 은택을 유구하게 이어지게 하고 백성들의 아픔을 없애고 예의의 풍속을 이루기를 염원하였다. 이에 하인들을 모아 3일간의 공사 끝에 온천을 정비하였다.

[의의와 평가]

「온양온천북탕기」온양온천의 퇴락했던 풍경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온천을 수리, 보수하는 남구만의 행동을 통해 온천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군(君)·신(臣)·민(民)이 함께 즐거움을 누리려는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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