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94
한자 李箕永
영어공식명칭 Lee Giyeong
이칭/별칭 민촌(民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회룡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 5월 29일연표보기 - 이기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3년 5월 30일~1933년 7월 1일 - 이기영 『조선일보』에 『서화』 연재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1월 15일~1934년 9월 21일 - 이기영 『조선일보』에 『고향』 연재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이기영 북한에서 『두만강』 1부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이기영 북한에서 『두만강』 2부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이기영 북한에서 『두만강』 3부 발표
몰년 시기/일시 1984년연표보기 - 이기영 사망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회룡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천안시 북일면 중암리
성격 소설가
성별
본관 덕수
대표 경력 중편 『서화』|장편 『고향』|장편 『두만강』

[정의]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호는 민촌(民村)이며, 충무공 이순신의 12대손이다. 집안이 이사를 하면서 충청남도 천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소설가이다.

[활동 사항]

이기영(李箕永)[1895~1984]은 1895년 5월 29일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회룡리[현 배방읍 회룡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사립 영진학교(寧進學校)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1910년에는 잠업전습소(蠶業傳習所)에서 6개월 과정으로 양잠 기술을 배웠다. 답답한 농촌생활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컸고, 방랑생활을 하다가 충청남도 논산의 사립 영화여학교(永化女學校) 교원, 군청 고원(雇員)[임시 직원], 호서은행(湖西銀行) 직원 등으로 일을 했다.

1922년 28세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도쿄의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며 고학(苦學)을 이어갔다. 그러나 1923년 동대지진(關東大地震)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돌아왔다. 짧은 시기였지만, 러시아문학에 심취하여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1924년 잡지 『개벽(開闢)』 현상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유학 도중 만난 소설가 조명희(趙明熙)의 소개로 사회주의 잡지 『조선지광(朝鮮之光)』 편집기자가 되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참가하면서 프로문학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로 인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중편 『서화』, 장편 『고향』 등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올렸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1944년부터 강원도 철원에서 숨어 지내다가, 광복이 되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 창립을 주도했고, 1946년 말 월북했다. 북한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두만강』을 발표했다. 1984년 90세로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이기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중편 『서화(鼠火)』, 장편 『고향』과 『두만강』 등을 들 수 있다.

[상훈과 추모]

이기영은 북한에서 인민예술가 칭호 및 국기훈장 1급을 수훈하였다. 북한에서 발표한 『두만강』으로 인문작가상을 받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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