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99
한자 趙泰萬
영어공식명칭 Jo Taeman
이칭/별칭 제박(濟博),고박재(古朴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72년연표보기 - 조태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17년 - 조태만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음
활동 시기/일시 1721년 - 조태만 『양주조씨족보』 초고 완성
활동 시기/일시 1722년 - 조태만 세제 익위사시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4년 - 조태만 탄핵을 받아 체직됨
몰년 시기/일시 1727년연표보기 - 조태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43년 - 조태만 증직
거주|이주지 은거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동정리 지도보기
외가|처가 처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양주
대표 관직|경력 세제 익위사시직

[정의]

조선 후기 충청도 아산 지역에 학당을 지은 문인.

[개설]

조태만(趙泰萬)[1672~1727]은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에게 수학하였으며, 아산 지역에 응조당(應潮堂)이란 학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가계]

조태만의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제박(濟博), 호는 고박재(古朴齋)이다. 아버지는 호조참의 조가석(趙嘉錫)이며, 어머니는 윤이명(尹以明)의 딸 남원윤씨(南原尹氏)이다. 동생은 유봉휘(柳鳳輝),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최석항(崔錫恒)과 함께 소론(少論)의 5대신인 조태억(趙泰億)이다. 부인은 풍천임씨(豊川任氏) 임홍망(任弘望)의 딸이고, 아들은 조진빈(趙震彬)이다. 사위는 좌의정을 지낸 정휘량(鄭翬良),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낸 심성진(沈星鎭)이다. 1700년대의 양주조씨(楊州趙氏) 집안은 서인(西人) 소론과 노론(老論)의 수뇌부가 공존하는 집안이었다. 동생 조태억은 소론의 지도자였지만, 조태만은 소론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조태만은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2년(경종 2) 또다시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아 세제(世弟) 익위사시직(翊衞司侍直)에 임명되었다. 당시 세제[훗날의 영조]가 자신을 낮추어 어진 선비를 대접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관직을 흔쾌히 받아들였으나, 김일경(金一鏡)과의 갈등으로 소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때의 일이 『경종실록』[1722년 3월 27일 임자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태만이 기이한 행동을 좋아하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매우 독실하고 문사(文詞)를 좋아하였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술을 마신 후에는 종종 세상일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기사(奇士)’, 즉 기이한 재주를 가진 선비라고 불렀다."

1724년(경종 4) 사간원으로부터 조태만이 시직(侍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다며 탄핵을 받아 체직(遞職)되었다. 그 후 영조가 즉위하고 조태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1743년(영조 19) 영조는 "옛말에 이른바, ‘세상은 모두 흐리지만 나는 홀로 맑다.’는 것을 내가 조태만에게서 보았다. 성질은 간혹 과격하나 그 사람은 유일(遺逸)인데, 자리를 불사른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 기개를 볼 수 있었다. 특별히 자급을 올려 증직하고, 그 자손 또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영조가 동궁에 있던 시절 조태만과 김일경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목격했기 때문인데, 당시 위세를 떨치던 김일경의 겸종(傔從)을 채찍질하였던 일에 관한 것이었다. 조태만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는 임천상(任天常)이 1788년(정조 12)에 편찬한 야사집(野史集) 『쇄편(蔘編)』에 조태만이 소를 타고 과거시험장에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태만임홍망의 딸과 혼인하며 처가가 있는 아산 지역과 인연이 되어 독정(獨亭)[독징이마을, 현재 염치읍 동정리]에 응조당이라는 학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임홍량(任弘亮)의 『폐추유고(敝帚遺稿)』에 「응조당서(應潮堂序)」가 기록되어 있다. 「응조당서」에 따르면 조태만이 독정에 살면서 공부할 장소를 구해 원근의 선비들을 모아 가르치다가 맹자의 ‘관수유술(觀水有術)’이란 뜻을 취하여 향당의 이름을 ‘응조’라고 하였다 한다. ‘관수유술 필관기란(必觀其瀾)[물을 구경하는 데에 방도가 있으니, 반드시 그 급한 여울물을 보아야 한다.]’에서 나온 말인데, 여울물을 보면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도(道)의 근본이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학문과 저술]

기인으로 알려진 만큼 독특한 저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문집은 편찬되지 않았고, 1721년(경종 1) 『양주조씨족보(楊州趙氏族譜)』의 초고를 완성한 것이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

1743년 영조는 조태만의 선비정신을 칭송하며 특별히 증직하고 자손을 조용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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