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97
한자 朴知誡
영어공식명칭 Park Jigye
이칭/별칭 인지(仁之),잠야(潛冶),문목(文穆)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성봉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 박지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박지계 왕자사부로 천거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음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박지계 익위사 좌세마 겸 서연관으로 천거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음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박지계 조극선을 제자로 받아들임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박지계 원종추숭론으로 김장생과 의견 대립
활동 시기/일시 1634년 4월 - 박지계 동부승지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박지계 사망
출생지 황해남도 송화군 읍내리
거주|이주지 은거지 - 충청북도 제천시
거주|이주지 은거지 - 충청북도 괴산군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거주|이주지 이주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수학|강학지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박지계 묘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리
사당|배향지 인산서원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함양
대표 관직|경력 동부승지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에서 활동한 학자.

[개설]

박지계(朴知誡)[1573~1635]는 조선 후기 서인계(西人系) 예학자(禮學者)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文廟) 배향을 주장하였으며, 권득기(權得己)와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 유명한 철학적 논변을 하였다.

[가계]

박지계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인지(仁之), 호는 잠야(潛冶),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할아버지는 소요당(逍遙堂) 박세무(朴世茂)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이다. 아버지는 수안군수를 지낸 박응립(朴應立)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이숙(李琡)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유간(李惟侃)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지계는 1573년(선조 6) 황해도 해주목 송화현[현재 황해남도 송화군] 관아(官衙)에서 출생하였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아버지가 항상 독서하라고 하였다 하여 15세에 이르기까지 공부하지 않은 날이 겨우 4일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시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논어』를 탐독해 장차 대유(大儒)가 될 이상을 갖추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제천으로 피난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괴산에 머물면서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1606년(선조 39) 이조판서 허성(許筬)이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천거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09년(광해군 1) 옥당(玉堂)의 최현(崔晛)이 학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동궁(東宮)을 보도(輔導)[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함]하려고 익위사(翊衛司) 좌세마 겸 서연관(左洗馬兼書筵官)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조정의 신하 가운데 광해군의 생모에게 비호(妃號)를 올리자는 주장이 있자 신창현[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이곳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권득기(權得己), 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이명준(李命俊)의 소개로 조극선(趙克善)을 제자로 받아들이었다.

1620년(광해군 12) 호우에 기근으로 남양[현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으로 이주하였다가, 1624년(인조 2) 정원군(定遠君)[원종]을 추숭(追崇)하자는 상소를 올려 김장생(金長生)과 의견이 대립하였다. 1624년 4월 남양에서 신창현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1630년(인조 8) 다시 아산현[현재 아산시 염치읍·음봉면·둔포면·영인면·인주면 일대]으로 이주 후 1634년(인조 12)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635년(인조 13) 사망하여 서산에 장사를 지냈다. 박지계의 제자로는 조극선 외에도 이의길(李義吉), 김극형(金克亨), 권시(權諰), 원두추(元斗樞) 등이 있다.

[학문과 저술]

『사서근사록의의(四書近思錄疑義)』, 『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잠야집(潛冶集)』 등을 저술하였다.

[묘소]

박지계의 묘소는 1643년(인조 21) 서산에서 청주 남이면 사동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리]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에 있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6.09 이름 수정 이곳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권흥(權興), 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고, -> 이곳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권득기(權得己), 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고, 박지계의 제자로는 조극선 외에도 이방숙(李芳淑), 김극형(金克亨), 권시(權諰), 원두추(元斗樞) 등이 있다. -> 박지계의 제자로는 조극선 외에도 이의길(李義吉), 김극형(金克亨), 권시(權諰), 원두추(元斗樞)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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