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91
한자 趙翼
영어공식명칭 Cho Ik
이칭/별칭 비경(飛卿),포저(浦渚),존재(存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선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9년연표보기 - 조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조익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1년 - 조익 정인홍 등의 반대로 고산찰방으로 좌천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조익 사직 후 광주에서 은거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조익 신창현에서 우거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조익 이조정랑에 임명, 대동법 장단점 조사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조익 이괄의 난으로 호가하여 공주로 남하
활동 시기/일시 1625년 - 조익 대동법 혁파를 반대하는 계사를 올림, 승지에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26년 - 조익 한성부좌윤, 개성유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조익 예조판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조익 병자호란 때 호종하지 못해 삭직·유배됨
활동 시기/일시 1646년 - 조익 이조판서 사직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조익 의정부좌참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0년 - 조익 좌의정 역임
몰년 시기/일시 1655년연표보기 - 조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60년 - 조익 문효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670년연표보기 - 조익 도산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92년 - 조익 손자 조지정, 조지항이 『포저선생유서』 간행
추모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조익 신도비 건립
출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거주|이주지 은거지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
거주|이주지 은거지 -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조익 묘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산33-1
사당|배향지 도산서원 -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사당|배향지 숭양서원 - 개성특급시 선죽동
사당|배향지 명고서원지 -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
성격 문관
성별
본관 풍양
대표 관직|경력 대사헌|좌의정

[정의]

조선 중기 대동법 실시를 주도하였던 학자이자 문신으로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의 풍양조씨 입향조.

[개설]

조익(趙翼)[1579~1655]은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을 확장, 시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풍양조씨(豐壤趙氏) 중시조(中始祖) 평장사공(平章事公) 조신혁(趙臣赫)의 10세손으로 도고면의 풍양조씨 입향조(入鄕祖)이다.

[가계]

조익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존재(存齋)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현범(趙賢範)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한풍군(漢豊君) 조안국(趙安國)이다. 할아버지는 현령(縣令) 조간(趙侃)이며, 아버지는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 등을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조영중(趙瑩中)이다.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아산현감을 지낸 윤춘수(尹春壽)의 딸이다. 경기도 광주(廣州)가 고향이고,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부인은 도고면 도산리에 살고 있던 성주현씨(星州玄氏)로 무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현감을 지낸 현덕량(玄德良)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익임진왜란 중에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으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관직을 시작하여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직을 두루 걸쳤다. 1611년(광해군 3)에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정여창(鄭汝昌) 등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주장하다가 정인홍(鄭仁弘) 등의 반대로 좌천되어 함경도의 고산(高山) 도찰방(道察訪) 등 외직에 나갔으나 1613년(광해군 5) 사직하고 고향인 광주[현재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로 내려갔다.

1613년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영창대군이 사사되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은거하면서 생활하다가 1618년(광해군 10)에는 처가가 있는 신창현[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에 가솔들을 보내고 1623년(광해군 15)까지 5년여 동안 광주와 신창을 오가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조익은 이때 박지계(朴知誡)와 권득기(權得己), 온양의 조상우(趙相禹) 등과 교유하고 강론하는 한편, 제자들을 배출하여 아산 지역의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출사하였고, 왕명으로 경상도와 전라도로 내려가 대동법의 장단점을 조사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대동법의 혁파를 반대하는 계사(啓辭)를 올려 승지(承旨)에서 파직되었다. 1623년(인조 원년) 충청도에서 실시되었던 대동법이 준비 미비와 지주와 방납인(防納人)[공납자의 공물(貢物)을 대신 관아에 바치고 그 대가를 공납자로부터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대로 1625년에 폐지되었다. 1654년(효종 5) 충청도에서 다시 대동법이 시행되었는데, 이때 조익김육과 함께 시행 세칙을 만드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631년(인조 9)에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 1633년(인조 11) 예조판서를 시작으로 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느라고 왕을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하지 못해 삭직(削職), 유배되었다. 그러나 효성에서 비롯된 일이고, 뒤에 패잔병을 모아 적과 싸우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자 했음이 밝혀져 풀려났다. 59세 때인 1637년(인조 15) 신창으로 돌아와 1648년(인조 26)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관직에 복직할 때까지 약 10년간 머물렀다. 1649년(인조 27)부터 예조판서, 대사헌,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55년(효종 6) 광주에서 77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대학곤득(大學困得)』, 『중용곤득(中庸困得)』, 『논어천설(論語淺說)』, 『맹자분류천설(孟子分類淺說)』, 『서경천설(書經淺說)』, 『맹자천설(孟子淺說)』, 『역상개략(易象槪略)』, 『가례향의(家禮鄕宜)』, 『주서요류(朱書要類)』 등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1688년(숙종 14) 간행된 『포저집(浦渚集)』과 1692년(숙종 18) 간행된 『포저선생유서(浦渚先生遺書)』가 있다.

[묘소]

조익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산33-1번지에 있다. 묘 앞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쓴 비문을 윤용구(尹用求)가 써서 1927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조익의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광주[현재 화성시]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되었다. 1670년(현종 11)에 세워진 도산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 때 철폐되었는데 풍양조씨 문중에서 2006년 조익의 묘가 있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종산(宗山)에 이전·복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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