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85
한자 朴澨
영어공식명칭 Bak Seo
이칭/별칭 상지(尙之),현계(玄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남상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 - 박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박서 금화사별좌, 의금부도사, 선공감주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박서 정언, 지평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5년 - 박서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 부수찬·부교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47년 - 박서 병조참판에 임명, 천추사로 원나라 연경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48년 - 박서 사간원대사간·사헌부대사헌·한성부좌윤 겸 의금부총관에 임명, 경주부윤으로 좌천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박서 부총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0년 - 박서 도승지, 공조판서, 지경연 겸 지춘추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박서 진향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대사헌·의금부지사·우참찬·예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박서 시무 5조를 올림
몰년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박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65년연표보기 - 박서 신도비 건립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묘소|단소 박서 묘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성격 문관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관직|경력 병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문신.

[개설]

박서(朴澨)[1602~1653]는 조선 17대 왕인 효종과 뜻을 같이하여 오랫동안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군사력 정비에 힘써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가계]

박서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지(尙之), 호는 현계(玄溪)이다. 1602년(선조 35) 온양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장단부사(長湍府使) 박옹(朴顒)이며, 아버지는 병조좌랑(兵曹佐郞) 박효남(朴孝男)이다. 형은 여절교위(勵節校尉) 박추(朴簉)이다. 어머니는 정희준(鄭希俊)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서는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에게 글을 배웠으며 유년 시절부터 시를 잘 써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 입격(入格) 후 3년 뒤 금화사별좌(禁火司別座), 의금부도사, 선공감주부(膳工監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홍문관 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41년(인조 19) 수찬(修撰)이 되었고, 집의(執義)·교리(校理)를 거쳐 1643년(인조 21)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이어서 황해도관찰사 재직 중에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1647년(인조 25) 병조참판에 임명된 뒤 천추사(千秋使)로 중국 원나라 연경(燕京)[현재 베이징]에 다녀왔으며 도승지로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간원대사간, 사헌부대사헌,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겸 의금부총관(義禁府摠管)이 되었다.

한성부좌윤 겸 의금부총관에 재직 시 대사간(大司諫)과 함께 차자(箚子)[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인조가 고칠 것을 명하자, "왕이 차자를 고치라고 하는 것은 왕의 잘못이며, 임금이 잘못한 내용을 고칠 수 없다."고 해서 인조의 비위를 건드려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좌천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인조 승하 후 부총관(副摠管)으로 기용되었고, 도승지에 이어 공조판서에 올라 지경연(知經筵)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였다. 1651년(효종 2) 진향부사(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대사헌,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우참찬, 예조판서 등을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다.

[묘소]

박서의 묘소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53년(효종 4) 52세 때 병조판서로 국방 강화와 병권 확립에 전력을 쏟던 중 갑자기 죽자, 효종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관재(棺材)와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자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1665년(현종 6)에 건립된 신도비는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이 비문을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하였다.

[참고문헌]
  • 『아산인물록』(온양문화원, 200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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