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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245
한자 旗歲拜
영어공식명칭 Gisebae
이칭/별칭 농기싸움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탁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작 시기/일시 1970년대 - ’기세배’가 ‘농기싸움’이라는 명칭으로 전해 옴
의례 장소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오목리]
의례 장소 충청남도 아산군 선장면[군덕리]
성격 민속놀이

[정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두 마을이 정초에 농기로 싸우는 놀이 중 예의를 표하며 세배를 올리던 행위.

[개설]

기세배(旗歲拜)는 농기(農旗)싸움 놀이의 일부로, 전체 놀이는 길놀이, 기세배, 기돌림, 기싸움, 뒤풀이 순으로 진행된다.

[연원 및 변천]

기세배의 명칭이 확인되는 최초의 자료는 일제강점기 간행물 『신동아(新東亞)』「함열의 기쟁」 부분에 "함열(咸悅)의 정월 상원 풍속(正月上元風俗)에 동리(洞里)끼리 기세배를 서로 먼저 받으려다가 야기(惹起)하는……"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1941]에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정월 보름에 "농기들이 상호 인사로 예를 표한다."라고 쓰여 있어 기세배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여 준다.

[절차]

1970년대까지 신창면[오목리]과 선장면[군덕리]에서는 마을에서 농악대가 길에서 마주친 농기를 빼앗는 민속놀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승되지 않는다. 당시 ‘기세배’라는 말보다는 ‘농기싸움’이라는 명칭으로 전해 내려왔다. 농기싸움은 길놀이, 기세배, 기돌림, 기싸움, 뒤풀이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길놀이는 두 마을이 농기싸움을 할 날짜와 장소, 인원수 등을 미리 정하고 준비가 끝나면 동시에 두 마을의 농악대와 그 일행이 농기를 앞세우고 영기(令旗), 농악, 싸움꾼, 주민들 순으로 대열을 이루어 지정된 장소로 행진하였다. 이때 농악대는 길군악[길을 가면서 연주하는 행악]이나 길군악칠채[한 장단에 징을 일곱 번 치는 행악]를 연주하면서 춤을 추고 함성을 질러 상대방의 기세를 눌렀다. 농기싸움 장소에 도착하면 중앙에 농기를 세우고 잦은가락에 맞추어 원을 이루면서 함성을 지르고 빙빙 돌다가 멈춘 뒤, 양쪽의 농기가 동시에 기수(旗首)를 숙여 절을 하는데 이를 기세배라 하였다.

기돌림은 기잡이가 농기의 대 밑부분을 허벅지 사이에 끼고 기를 돌리기도 하고 기에 오르기도 하며 무동(舞童)을 세워 온갖 기량을 펼치는 놀이인데, 굿거리, 삼채[한 장단에 징을 세 번 치는 일], 허튼가락으로 장단을 맞춘다. 기싸움은 기돌림을 하다가 상쇠가 쇠를 몰아쳐서 끊으면 이것을 신호로 시작한다. 이때 기싸움꾼이 상대방의 기를 쓰러뜨리고 기수에 꽂힌 뀡장목[깃곶이]을 먼저 빼앗으면 이기게 된다. 각 편의 농악대는 허튼장단을 쳐서 응원한다. 승부가 나면 승자와 패자 모두 뒤풀이 행사에 동참하는데 이때 굿거리, 삼채, 자진모리장단 등의 가락을 상쇠의 지휘에 따라 연주하였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농기는 마을의 번영을 상징하는 권위와 무속적인 신성함를 지니고 있다. 농기를 훼손하면 마을에 불상사가 생긴다고 믿었다.

[다른 지역 사례]

경상북도 문경시 성저마을에서는 정월 열엿새에 모산굴 위령제에 참가하는 여러 마을이 기를 앞세우고 이 마을을 방문하여 모산굴 입구에 서 있는 마을기에 세배한다. 이 놀이는 ‘기세배’, ‘성밑 굴 빌기’, ‘귀신 달구기’, ‘기싸움’, ‘모산굴별신놀이’ 등의 이름으로 전승되어 왔는데, 조사 기관이 성격과 양상을 고려하여 ‘문경 모산굴 기세배’로 통칭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피해 모산굴에 숨었던 마을 사람들이 죽어 마을에 흉사가 많아지자, 위령제를 지내 마을이 다시 평안하게 되어, 이 의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월 열엿새날에 성저마을을 중심으로 주변 10~20여 개 정도 마을이 모산굴 입구에 모여 기세배 의례를 행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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