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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998
한자 孝子鄭壽徵旌閭
영어공식명칭 Monument for Filial Son Jeong Su-jing[Hyoja Jeong Su-jing Jeongnyeo]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읍내동 31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54년연표보기 - 효자 정수징 명정이 내려짐
이전 시기/일시 1859년 - 효자 정수징 정려가 건립되고 명정비가 세워짐
현 소재지 효자 정수징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읍내동 311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읍내동에 있는 효자 정수징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정수징(鄭壽徵)[1691~1747]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을 차려드렸고, 추운 겨울밤에는 부모님이 추워하실까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을의 관리가 되어서는 항상 부모님께 문안을 드린 다음 관청에 들어갔다. 부모님의 병환에는 자신의 효심이 부족한 것이라 하여 추운 겨울에도 찬물에 목욕재계한 뒤 자기 몸으로 병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기도하였다. 약을 드릴 때는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부모님이 입던 옷은 직접 빨아 드렸다.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통곡하여 몸이 상하였으나 끝까지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때는 선비들과 뜻을 모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군의 경계를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사람들이 정수징에게 충효를 말하면 화난 것처럼 큰 소리로 꾸짖으며 이르기를 "충효라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56세 때의 어느 날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자식들과 음식을 즐긴 후 종에게 말에 안장을 갖추라고 한 후 식구들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말 위에 오른 뒤 앉아서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정수징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1854년(철종 5)에 효자 명정이 내려지고 가선대부로 추증되었다.

[위치]

효자 정수징 정려아산시 읍내동에 있다. 읍내동 남쪽의 읍내사거리에서 남서쪽 200m 지점의 오른쪽 샛길로 접어들면 북쪽 100여m 위치에 정려가 있다. 핑곳재[빙곳재] 산능선 남쪽 끝의 남동쪽 중턱에 있다.

[형태]

효자 정수징 정려는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인 단칸 건물이다. 콘크리트로 기단을 만든 뒤 팔각의 긴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사면 벽은 하방 아랫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철제 홍살을 둘렀다. 가구는 익공식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채색 단청이 이루어졌고 좌우 측면에 부채꼴 풍판을 달았다.

정려 내부에는 명정 현판과 비석이 있다. 현판에는 ‘효자 증가선대부한성부윤겸오위도총부부총관 정수징지문 상지오년갑인이월일 명정(孝子贈嘉善大夫漢城府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鄭壽徵之門上之五年甲寅二月日命旌)’이라고 쓰여 있다. 글씨는 김시연(金始淵)이 썼다.

비는 네모꼴 대좌 위에 머리 부분이 둥근 원수형 비신을 세웠다. 앞면에는 ‘정효자리(鄭孝子里)’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숭정사기미팔월일 육세손이호립(崇禎四己未八月日六世孫彛好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 중 ‘숭정사기미’는 1859년(철종 10)이니 명정 후 5년 뒤에 세워진 비석이다. 정려각도 같은 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효자 정수징 정려는 일상 속에서 늘 지극한 마음으로 효도를 실천하였던 효자 정수징의 효행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소중한 유적이다. 또한 명정 현판과 명정비를 함께 갖춘 것은 조선 전기의 정려 양식이 변화하는 과도기적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서 조선시대 정려 양식 변천을 연구하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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