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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97
한자 李恒寧
영어공식명칭 Lee Hangnyeng
이칭/별칭 소고(小皐)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연표보기 - 이항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이항녕 자전적 소설 『청산곡』 발표
몰년 시기/일시 2004년연표보기 - 이항녕 사망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창신공립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학교|수학지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학교|수학지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1동 235번지
활동지 고려대학교 - 서울시 안암동
성격 문학가|교육가
성별
대표 경력 문교부 차관|홍익대학교 총장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행정관료이며, 현대 시기의 교육가이자 법학자.

[활동 사항]

이항녕(李恒寧)[1915~2004]의 호는 소고(小皐)이며, 1915년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둔포리[현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둔포공립보통학교[둔포초등학교 전신] 교원으로 재직하던 부친의 뜻에 따라 같은 학교에 입학하였다. 6학년 때 서울로 이사해 창신공립보통학교[서울창신초등학교 전신]를 거쳐,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경복고등학교 전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39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하동군수, 창녕군수를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제 공출, 징용, 징병 등에 앞장선 친일 경력을 부끄러워하며 1945년 8·15광복 이후에는 행정관료의 길을 버리고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초중등학교 교장으로 교육에 힘쓰다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대학교수의 길로 들어서,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단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1960년 5월부터 약 3개월 동안 문교부 차관을 지냈다. 1961년 자전적 소설 『청산곡』을 통해 친일 활동을 참회하였다. 1965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체결을 강도 높게 비판하여 1965년 9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교수직을 박탈당하였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홍익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문학가로 활동하였다. 2004년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작품으로는 1961년 자전적 소설인 『청산곡』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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