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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399
한자 牙山八文章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장가
관련 인물/단체 윤지복|민사성|공희성|차천로|정두경|이진행|정운붕|강취무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문장으로 이름난 8명의 인물.

[개설]

1819년(순조 19) 이호빈(李浩彬)이 편찬한 충청도 아산현의 지리지인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의 문장조(文章條)에는 윤지복(尹之復), 민사성(閔師聖), 공희성(孔希聖), 차천로(車天輅), 정두경(鄭斗卿), 이진행(李震行), 정운붕(鄭雲鵬), 강취무(姜就武) 등 8명의 문장가를 소개하고 있다. 윤지복, 민사성, 공희성, 이진행, 강취무 5인은 대를 이어 아산에서 세거하던 인물이고, 정두경·차천로·정운붕 3인은 모두 타지에서 아산으로 들어와 우거(寓居)한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중에서 차천로와 정두경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 배경]

윤지복[1569~163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녕(新寧)이며 자(字)는 득초(得初)이다. 37세 되던 1605년(선조 38) 진사에 입격(入格)하고, 이듬해에 다시 식년 문과에 급제(及第)하였다.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지냈다. 윤지복의 묘소는 영인면 신화3리 여술마을에 있다.

민사성[1659~?]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학이(學而)이다. 1690년(숙종 16) 생원시에 입격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공희성[1567~?]의 본관은 곡부(曲阜)이며 자는 언명(彦明)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 2등으로 입격하였으며 『사마방목(司馬榜目)』을 보면 거주지는 아산으로 되어 있어 당시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자세한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이진행[1586~?]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자구(子懼)이다. 공희성과 같은 해인 1609년(광해군 1) 진사 2등으로 입격하였다. 거주지 역시 아산으로 기록되어 있어 아산 지역에서 활동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강취무[?~?]는 1616년(광해군 8) 알성시(謁聖試) 병과 8위로 급제하였으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번창하여 아산 지역에서 자리 잡은 진주강씨(晉州姜氏)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정운붕[1563~?]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만리(萬里)이다. 1606년(선조 39) 식년시 을과에 급제한 기록만 남아 있다.

차천로[1556~1615]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83년(선조 16)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오면서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담당하였다. 문명(文名)이 명나라에까지 떨쳤고, 왜란이 끝난 뒤에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송별시를 지어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아버지 차식(車軾), 아우 차운로(車雲輅)와 함께 세인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가사(歌辭)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정두경[1597~1673]의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선대부터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1629년(인조 7) 별시 초선(初選)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정두경은 아산에 은거하면서 인조 대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어 즉위한 효종에게 임금이 마땅히 해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諷詩)로 지어 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 26권이 있다.

[결과]

‘아산팔문장(牙山八文章)’이라 칭해지는 인물들의 생몰년을 살펴보면 대략 1500년대 중반부터 1600년대 후반까지의 인물들로 당시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문인들임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지리지인 『신정아주지』에 유일하게 ‘아산팔문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인물들의 기록이나 행적이 자세하지는 않다. 특히 아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록이나 연구가 없어 아쉬움이 남지만, 아산 지역의 주요한 문화 콘텐츠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추후 지역과 연계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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