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정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15
한자 海莊精舍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612년 무렵연표보기 - 해장정사 건립
훼손 시기/일시 1996년 - 해장정사 터에 연성2지구 택지 개발 사업으로 아파트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38년 - 장유 선생 묘 시흥시 장곡동 상양산 덕수 장씨 세장지에 자리를 잡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9년 5월 21일연표보기 - 시흥시 장곡동 매꼴마을 유래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12월 22일연표보기 - 시흥시 장곡동 매꼴공원 인선왕후 좌상 건립
원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산68 지도보기
관련 인물 장유

[정의]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에 있었던 신풍부원군 장유의 가옥.

[개설]

해장정사(海莊精舍)장유(張維)가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자 고향인 안산[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산68]으로 낙향하여 12년간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외아들 장선징(張善徵)인선왕후(仁宣王后)를 낳았다. 이 곳에서 장유는 손수 농사를 짓고 독서를 하고 시를 지으며 촌부들과 어울려 살았다. 특히 「호미씻이」라는 칠언고시에서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농촌 풍습과 세금을 걷는 아전의 횡포 등을 그렸다. 또한 이곳에서 사부(詞賦), 운문(韻文), 고문(古文)을 모아 총 4권 2책의 『묵소고갑(默所稿甲)』를 편찬하였다.

이후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에 가담해 중앙 정계에 나가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7년(인조 15)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안산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장유가 자신이 거처하던 해장정사에 대해 쓴 기문(記文) 「해장정사기(海莊精舍記)」가 전한다.

[건립 경위]

해장정사가 위치한 곳은 시흥시 장곡동으로 증조할아버지 장임중(張任重)의 호호정이 있었다. 서쪽 구릉 상양산 자락에는 덕수 장씨(德水張氏) 세장지(世葬地)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에는 어머니 정경부인 밀양 박씨[추정], 장옥(張玉), 장륜(張綸) 등 선대 묘소, 장유의 초장지(初葬地)와 독립운동가 장수산(張壽山)의 묘 등이 있었으나 개발로 거의 이장되거나 실전되었다. 이곳에 서대문 근처에 살던 장유가 낙향한 것은 26세 때인 1612년(광해군 4) 김직재의 무옥과 연관되어 누이동생의 남편 황상(黃裳)이 역모로 몰려 처형되면서 한집안이라는 이유로 파직되고, 이어 폐모론으로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등 서인의 명사들이 대거 숙청되는 가운데 더는 서울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지은 「귀전만부(歸田漫賦)」에 “생각하면 변하는 세상일 덧없는 허깨비와 같으니/ 분분한 모든 일을 편안히 바라보자.”고 위안하였다. 그리고 호를 묵소자(黙所子)라 지어 세상에 대해 입을 닫고 침묵으로 처세하였으며 정철(鄭澈)의 아들이자 동문인 정홍명(鄭弘溟) 에게 묵소기(黙所記)를 부탁하였다. 교유는 충청도 면천의 이재대(李載大)가 찾아와 「사오당시서(四吾堂詩序)」를 써준 일과 인근의 부로(父老)들과 어울리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위치]

해장정사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산 68번지에 있었다.

[형태]

2018년 현재 해장정사는 그 터조차 남아 있지 않다. 1996년 ‘연성2지구 택지 개발 사업’으로 매꼴동양덱스빌아파트가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개발되기 전 해장정사 자리에 장순태[장유의 동생인 장신(張紳)의 후손]의 10여 칸의 초가집과 앞에 연자방아가 있어서 방앗간집으로 불렸다. 1999년 시흥문화원과 덕수 장씨 안산종회가 택지 개발로 장곡동의 자연 마을이 사라지게 되자 매꼴마을 터에 위치한 매꼴삼성아파트에 매꼴마을 유래비를 건립하였다.

[현황]

해장정사가 있던 곳은 2018년 현재 매꼴동양덱스빌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해장정사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행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해장정사기」를 통해서 서인의 중요 인물이었던 장유가 광해군 때 시흥시 장곡동으로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금 조정에 복귀하기까지의 생활과 행적을 알 수가 있어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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