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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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鍾甲 |
영어공식명칭 | I Jonggap |
이칭/별칭 | 척산(尺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선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0월 - 이종갑 북간도로 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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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무주군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
[정의]
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흥양(興陽), 호(號)는 척산(尺山). 아버지는 이시발(李時發)이다. 이시발은 1894년(고종 31) 교우하던 유완무(柳完茂)가 나라를 걱정하며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활동할 때 그와 뜻을 같이하면서 그의 처자식을 친히 돌보았다. 김구(金九)가 무주를 방문하자 상봉하여 구국의 방책 등에 대하여 장시간 토론하였다. 한편, 어버이를 잃고 의탁할 곳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돌보았으며, 1898년(고종 35)에는 무주 군수 이하섭(李夏燮)과 함께 문묘(文廟)를 보수하고 양사재(養士齋)를 이건하였다. 또한 경상북도 상주 옥성 서원(玉成書院)과 금산 학암 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영호남 사림(士林)과 유계(儒契)를 설립하고 ‘대덕산방(大德山房)’이라 이름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유완무·오재영 등과 함께 간도로 가서 육진(六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제를 무찌를 계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고종(高宗)을 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도남 서원(道南書院)·병산 서원(屛山書院)·도산 서원(陶山書院)에 발문(跋文)을 띄우며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자 ‘단기고국회갈유민(檀箕古國懷葛遺民)’이라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이종갑(李鍾甲)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지동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30세 때인 1907년(순종 1) 10월 27일 아버지의 명으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한계(韓溪) 이석희(李錫熙)의 밀서(密書)를 청나라에 전하고자 배편으로 바다를 건넜다. 잉커우[營口]와 톈진[天津]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들어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간도(北間島)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유완무의 휘하로 들어가 활약하며 여러 곳에서 동포에게 충의에 대한 연설을 하고 다녔다. 유정구(柳亭口)와 봉밀(蜂蜜) 등지에서 학교를 세우고 정병(精兵)을 양성하였다.
주장(主將) 유완무가 우리나라와 일본이 병합(倂合)될 것을 미리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본국의 지사(志士)들과 합세하여 싸우려던 차에 아장(亞將) 이범윤(李範允)이 동료들과 밀모(密謀)하기를 “일본과 싸우다가는 반드시 실패하리라.” 하고 유완무를 살해하여 군위(軍威)가 흩어졌다. 이종갑은 이윤복(李允馥)과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로 탈출하여 4, 5년을 보내고 다시 간도로 돌아와 복수하고, 유완무의 시신을 수습하여 북간도의 금당촌(金墉村) 뒷산에 매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