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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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炳斗 |
영어공식명칭 | Gim Byeongdu |
이칭/별칭 | 성재(聖哉),덕암(德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843년 - 김병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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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23년 - 김병두 사망 |
출생지 | 김병두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
성격 | 효자|자선가 |
성별 | 남 |
본관 | 김해(金海) |
[정의]
개항기 무주 출신의 효자이자 자선가.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성재(聖哉), 호는 덕암(德庵). 할아버지는 증통정대부 호조 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인 일제(一濟) 김국윤(金國允)이며, 아버지는 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 의금부 지사(嘉善大夫戶曹參判義禁府知事)에 추증(追贈)된 김창신(金昌信)이다.
[활동 사항]
김병두(金炳斗)[1843~1923]는 1843년(헌종 9)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맑고 언행이 단정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반드시 도움을 주고자 애썼다. 김병두가 사는 고을 사람들이 기근에 허덕이면 으레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1902년 전국에 괴질(怪疾)이 번져 민심이 흉흉하고 여기에 흉년까지 겹쳐 군민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자 자신의 가산을 털어 세금을 대신 내주었다.
김병두는 또 무주 군민들의 교육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필요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설립된 지 오래되어 퇴락한 무주 향교 명륜당의 보수가 전적으로 김병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는 김병두의 정신은 그의 아들인 김용승(金容昇)에게로 이어졌다. 김용승 역시 무주 향교의 보수와 수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무주에서 뒷섬[후도리(後島里)]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여 뒷섬 사람들이 무주를 왕래하는 데 크게 불편해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길을 확장하고 정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뒷섬 사람들이 김용승을 칭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02년 군민들의 세금을 대신 내주었다는 소식은 들은 고종은 김병두에게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의 직을 내렸으며, 무주 군민들은 각 면에 김병두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의 시혜 공덕비(施惠功德碑)를 세웠다. 2017년 현재, 시혜비는 무주군 무주읍·설천면·안성면·적상면·무풍면에 5개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