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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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礪石 |
영어공식명칭 | Gim Yeoseok |
이칭/별칭 | 은경(殷卿),심재(心齋),공목(恭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 1길 24-13[사전리 711-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정민 |
출생 시기/일시 | 1445년 - 김여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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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65년 - 김여석 식년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65년 - 김여석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70년 4월 5일 - 김여석 재행 겸비자 선정 |
활동 시기/일시 | 1478년 - 김여석 사헌부 집의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9년 - 김여석 건주위 정벌에 참전 |
활동 시기/일시 | 1482년 6월 22일 - 김여석 동부승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83년 11월 1일 - 김여석 승정원 도승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87년 3월 12일 - 김여석 충청도 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90년 7월 26일 - 김여석 병조 참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92년 6월 15일 - 김여석 예조 참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93년 2월 23일 - 김여석 형조 판서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493년 5월 3일[윤달] - 김여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93년 5월 3일[윤달] - 김여석 공목 추시 |
묘소|단소 | 김여석 묘소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
사당|배향지 | 도산 서원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1길 24-13[사전리 711-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형조 판서 |
[정의]
전라북도 무주 도산 서원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은경(殷卿), 호는 심재(心齋). 증조할아버지는 형조도관 좌랑(刑曹都官佐郞)을 지낸 김열(金閱)이며, 할아버지는 가선대부 병조 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된 김달손(金達孫)이다. 아버지는 강화 도호부사(江華 都護府使)를 지낸 김수(金洙)이고, 외할아버지는 권항(權恒)이다. 부인은 성천 부사(成川府使) 김익령(金益齡)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김상(金常), 둘째 아들은 김장(金章), 셋째 아들은 김당(金當)이다. 김상은 전생서 참봉(典牲署叅奉), 김장은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큰딸은 판서 윤계겸(尹繼謙)의 아들 진사 윤림(尹琳)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대사헌 허침(許琛)의 아들 진사 허굉용(許硡用)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김여석(金礪石)[1445~1493]은 1465년(세조 11) 진사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고, 같은 해 문과 별시(別試)에서 을과 2등(乙科二等)으로 급제하였다. 출사하여 성균 학록(成均學錄), 이조 좌랑(吏曹佐郞),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등을 거쳤다. 1470년(성종 1) 4월 성종(成宗)이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자를 택하여 예문관(藝文館) 겸관(兼官)을 차정(差定)할 때, 김종직(金宗直), 홍귀달(洪貴達) 등 30명과 함께 선정되었다. 사헌부 집의로 재직하면서 감찰과 서경(署經)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479년(성종 10)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으로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참전하여 군공을 세웠다. 이후 약 2년간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우부승지(右副承旨),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등의 내직과 충청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강원도 관찰사 등의 외직을 번갈아 지냈다. 1488년(성종 19)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으며, 병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1493년(성종 24)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형조 판서로 재직하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형전(刑典)」에 빠진 내용을 추가하였다. 즉 「형전」에서 살인하고 재물을 빼앗은 자의 처자를 거론하지 않아서 관노비(官奴婢)에 소속시키기도 하고, 소속시키지 않은 문제점을 지적하여 앞으로 항식으로 삼자는 의견을 개진하여 허락받았다.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되지 않고, 비교적 평탄한 관력을 누렸다.
[학문과 저술]
1467년(세조 13) 3월 세조(世祖)가 화위당(華韡堂)에서 종친(宗親)과 예문관(藝文館) 유신(儒臣),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의학인(醫學人) 등을 불러 그들이 하는 업(業)을 강(講)하게 하였다. 이때 세조가 젊은 김여석을 발견하고 이름과 과거 등제(登第) 연수를 물으며 “무릇 사람이 나이가 젊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쉽고, 기호(嗜好)와 욕심을 막기가 어렵다.”라고 하였다. 곧바로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무기음주 무교긍 인기욕(毋嗜飮酒毋驕矜忍嗜欲)’의 열 자를 쓰게 하여 친히 수결(手決)을 두어서 내려주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세조실록(世祖實錄)』과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김여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 『허백정집(虛白亭集)』, 후대의 『해동잡록(海東雜錄)』 등에 기재되어 있다. 또한 1470년 4월 재행 겸비자(才行兼備者)에 선발된 점 등을 고려하면 젊어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졸기에 사신(史臣)이 “서간을 쓰되 나는 듯이 붓을 휘둘러 잠깐 사이에 수십 장을 썼다.”라고 논평한 것으로 보아 글 쓰는 재주가 탁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존하는 김여석의 저서 및 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1483년(성종 14) 12월 26일 도승지 김여석이 정벌 이후 「공건주도(攻建州圖)」 등을 작성하고 내용을 보완하여 『기해년 정건주위도(己亥年征建州衛圖)』와 『일기』를 봉진하였다. 현재 이 자료는 전하지 않지만, 정벌의 대략적인 시말(始末)은 서거정의 『사가정집(四佳亭集)』에 나오는 「정건주행군도기(征建州行軍圖記)」에 남겨져 있다. 정벌의 종사관 김여석과 조석보 등이 화공에게 명하여 「공건주도」를 그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서거정에게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거정은 기문의 작성 과정에서 자신의 문집에 이 내용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김여석의 저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사가정집』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1479년의 건주위 정벌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에 중요한 사료이다.
[묘소]
묘는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미륵암에 있는데 봉분이 두 개 있다.
[상훈과 추모]
김여석이 사망하자 1493년(성종 24) 윤5월 3일 성종이 철조(輟朝)하고 사부(賜賻), 조제(弔祭)를 상례대로 하였다. 또한 ‘게을리하지 않고 지위를 구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이름이 실속과 다른 것을 목(繆)이라 한다.’며 공목(恭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같은 해 10월 홍귀달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1813년(순조 13)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에 있는 도산 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