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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432
한자 基谷里密陽朴氏孝烈五旌閭
영어공식명칭 Miryang Bakssi Hyoyeol Ojeongnyeo in Gigok-ri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 산7-5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기곡리 밀양박씨 효열 오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0년 - 기곡리 밀양박씨 효열 오정려 중수
현 소재지 기곡리 밀양박씨 효열 오정려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 산7-5 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밀양박씨 문중
관리자 밀양박씨 문중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에 있는 개항기 밀양박씨 가문의 효열 오정려.

[개설]

기곡리 밀양박씨 효열 오정려(基谷里密陽朴氏孝烈五旌閭)밀양박씨 문중의 효열 다섯 명의 정려(旌閭)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이다. 효자 박이겸(朴以謙)[1555~1613]과 박이항(朴以恒), 효열부(孝烈婦) 전주 원씨(全州元氏), 양주 조씨(楊州趙氏), 흥양 이씨(興陽李氏)를 연정(聯旌)하고 있다.

효자 박이겸의 자는 덕후(德厚), 호는 삼암(三巖), 본관은 밀양이다. 국당공(菊堂公) 박흥생(朴興生)의 후손으로 이조 참의(贈吏曹參議)에 증직된 박충현(朴忠賢)의 아들이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조헌(趙憲), 정술(鄭述) 등과 함께 교우하였고 언행과 몸가짐이 단정하였다. 시묘(侍墓)를 살던 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상제(喪祭)의 몸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낡은 도포를 입고 도의(道義)를 닦았다. 박이겸은 백록동(白鹿洞) 남전 향약(藍田鄕約)을 익혀 덕업계를 조직하였고, 『선천심학도(先天心學圖)』를 저술하였다. 후에 추천을 통해 정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효행과 학행을 겸비한 인물로 1789년(정조 13) 국헌(菊軒) 임옥산(林玉山)과 함께 장수 압계사(鴨溪祠)에 배향되었고, 후에 여러 차례 감사의 추천이 있어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1872년(고종 9)에 정려가 내려졌다.

효자 박이항박이겸의 동생으로 자는 덕구(德久), 호는 비암(秘巖)이다. 형 박이겸과 함께 읍청(揖淸) 박사종(朴嗣宗)에게 사사하고 덕행과 학행을 쌓았는데, 두 형제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하남(河南) 백숙(伯叔)에 비교할 만큼 효우(孝友)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운명할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연명하게 하였으며, 상중에는 형과 함께 초막(草幕)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예와 도를 다하였다. 당파를 싫어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나 역리학(易理學)에 능하였고, 천묵(天默) 이상형(李尙馨) 등과 함께 교우하고 강론(講論)하며 『대학입덕문가(大學入德門歌)』를 저술하였다. 1789년 형 박이겸과 함께 장수 압계사에 배향되었고, 1872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절부(節婦) 전주 원씨는 효자 박이항의 처(妻)로 성품이 정결하고 사리가 분명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편이 가족들을 데리고 장수 백운산으로 피신하면서, 우리가 한 곳에 가서 있다가 변을 당하면 한꺼번에 변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 각기 다른 곳으로 피하자고 하여, 각각 자녀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하였다. 그 때 왜병이 전주 원씨 등이 숨어 있는 백운촌(白雲村) 계곡에 들이닥쳐 전주 원씨를 끌고 가려 하자 당황하지 않고 대나무를 꺾어 들고 왜적을 때리며 크게 꾸짖으니 왜적이 모녀를 살해하였다. 이 사실은 살아 돌아온 계집종이 전하여 알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열녀(烈女) 양주 조씨는 박만령(朴萬齡)의 처로 성품이 곱고 온순하였으며, 시부모에게 하늘같이 순종하고 형제간에 화목하여 가정이 우애하였다. 남편이 병들자 성심으로 간호하였으나 끝내 죽음에 이르자 따라 죽기로 결심하고 있다가 밤이 되어 어두운 틈을 타서 남편이 생전에 사용하던 허리띠를 가지고 조용히 목을 매어 순사(殉死)로 정절을 지켰다. 1891년(고종 28)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효부(孝婦) 흥양 이씨는 박이암의 후손 박사흠(朴士欽)의 처로 성품이 단정하고 효양이 극진하였다. 국한문을 모두 다 배워 내칙편(內則篇)을 알아 그 당시 사람들은 효부 흥양 이씨를 여사(女士)라 칭하였다. 시부모의 병중에 극진한 효성으로 신명을 다하였으며, 남편이 죽자 삼상(三喪)을 마친 다음 남편을 따라 죽어 일부종사(一夫從事)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예(禮)를 절차에 따라 정성을 다한 후, 한 달이 지나 길제(吉祭)를 행하고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난 효열부(孝烈婦)이다. 1889년(고종 26)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위치]

무주 군청 앞 도로에서 무주군 산림 조합을 지나 750m 정도 가면 무주군 무주읍 오산 삼거리가 나온다. 오산 삼거리에서 무설로 성주 방면으로 우회전 후 7.2㎞ 정도 가면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 기곡 마을이 나온다. 기곡리 밀양박씨 효열 오정려기곡 마을남대천 건너 산기슭에 있다.

[변천]

1890년(고종 27)에 건립한 이래 1980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정려각은 앞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크기는 정면 3칸이 각각 183㎝, 183㎝, 183㎝이고 측면이 208㎝이다.

효자 박이겸의 정판 내용은 ‘효자 증자헌대부 사헌부 대사헌 밀양 박이겸지려 숭정 오 임신 도신사계 명정(孝子贈資憲大夫司憲府大司憲密陽朴以謙之閭崇禎五壬申道臣査啓命旌)’이다. 효자 박이항의 정판 내용은 ‘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밀양 박이항지려 숭정 오 임신 도신사계 명정(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密陽朴以恒之閭崇禎五壬申道臣査啓命旌)’이다.

절부 전주 원씨의 정판 내용은 ‘절부 증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박이항 처 숙인 전주 원씨지려 만력 무술 명정(節婦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朴以恒妻淑人全州元氏之閭萬曆戊戌命旌)’이다. 열녀 양주 조씨의 정판 내용은 ‘열녀 증통훈대부 장악원정 박만령지처 증 숙인 양주 조씨지려 숭정 오 신유 춘 조복계 명정(烈女贈通訓大夫掌樂院正朴萬齡之妻贈淑人楊州趙氏之閭崇禎五辛卯春曹覆啓命旌)’이다. 열녀 흥양 이씨의 정판 내용은 ‘열녀 증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밀양 박사흠지처 증 흥양 이씨지려 숭정 오 기축 춘 조복계 명정(烈女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密陽朴士欽之妻贈興陽李氏之閭崇禎五己丑春曹覆啓命旌)’이다.

[현황]

기곡리 밀양박씨 효열 오정려는 정려각 안에 정려 현판이 걸려 있는 상태로 보전되고 있다. 밀양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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