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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211
한자 衣生活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편성철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입었던 의복과 이와 관련된 생활 풍속.

[개설]

경기도 화성 지역의 의생활 문화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현대화되어, 혼례, 상례의 일부 복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양화된 복식을 착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빠르게 변화된 것으로 보이며 화성 지역 의생활의 특징은 해안 지역에서 겨울철 갯벌 작업을 하거나 갯벌을 건널 때 발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장비가 발달해있다는 점이다.

[일상복]

현재 화성 지역 주민들이 입고 있는 일상복은 서양 복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젊은층뿐만 아니라 노인층의 복식 역시 전통복장을 찾을 수 없다.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내륙으로는 수원과 인접해 있으며 송산면, 서신면의 해안가에서는 선박을 통해 인천과 교류했기 때문에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의복의 서양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자는 광목, 명주, 옥양목으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옷감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강장이나 인천 등지에서 구입해서 만들었다. 염색 역시 집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검정광목을 주로 구입하였다. 머슴들에게는 여름옷으로 베로 만든 등걸잠방이와 광목으로 만든 등걸잠방이를 한 벌씩 만들어주고 추석이 되면 광목으로 만든 중의적삼 한 벌을 만들어준다. 그렇게 계약기간이 끝나면 더이상 옷을 해줄 필요가 없지만 다음해에도 계속 머슴살이를 하겠다고 하면 겨울이 되기 전에 솜을 넣은 바지저고리를 광목으로 만들어 준다.

해안가 마을은 선편을 통해 주로 인천에서 광목을 구해오거나 내륙지역에서는 사강장 등에서 구입하였다. 때로는 마을에 들어오는 포목장사꾼들이 있어 그들에게 구입하기도 했다. 성인 남자의 바지저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 다섯 마 정도의 광목이 필요했다. 광목을 주로 이용한 것은 값이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이다. 광목 외에도 옥양목, 포푸린[poplin의 방언], 명주 등으로 옷을 만들었지만 아이들의 일상복은 검정광목으로 만들었다. 버선 역시 광목으로 만들었고 재배한 목화로 실을 만들어 대나무로 만든 뜨개바늘로 양말을 직접 만들어 신었다.

고무신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짚신과 나막신을 신었다. 짚신은 직접 삼았고 나막신은 손재주가 있는 이들은 직접 만들었지만 대부분은 사강장에서 구매하였다. 짚은 고운 짚새기와 막짚새기가 있는데 막짚새기로 만든 짚신은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맨발로 다니다시피 하였다.

1970년대부터 한복과 양복을 혼용하여 입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자식들에게 선물로 받기도 하고, 입어보니 활동할 때도 편하고 관리도 쉬워서 이제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복은 입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장에 가면 검정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나 갓을 쓰고 구두를 신고 나온 노인들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장터에서도 그러한 복장을 볼 수 없다. 여성들도 속옷부터 서양식으로 시작해서 점차 서양식 복장으로 변화하였다.

[의례복]

출산 후 아기가 입을 배내옷은 출산 전 천을 구입해 미리 준비를 해둔다. 아기의 배와 아랫도리를 둘러두는 치마처럼 생긴 형태로 손 부분은 벙어리장갑처럼 마감하여 손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한다. 융이나 옥양목으로 이것을 만드는데 남양읍 시동에서는 이를 '두렁치'라고 불렀다.

혼례때 입는 사모관대와 족두리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장만해두고 대여를 했다. 비용은 마을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송산면 중송리에서는 쌀 한두되 정도였다. 이렇게 생긴 비용은 모두 마을 경비에 충당되었다. 신랑이 입는 하얀 두루마기는 새로 만들거나, 마을에서 부부금실이 좋은 사람의 것을 빌려서 사용했다. 1970년대 이후 화성 지역에서도 예식장 결혼이 시작되었는데 신부는 하얀색 치마, 저고리에 면사포를 쓰고 신랑은 양복을 입었다.

수의는 본인이 직접 준비하거나 자식들이 준비한다. 수의를 해놓으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가 있어 기회가 될 때 미리 수의를 장만한다.

지금은 초상이 나면 부조금을 내지만 송산면 천등리에서는 옷으로 부조를 대신했다. 친정이나 시가에 초상이 나면 '베'로 만든 상복 두루마기, 광목으로 된 치마저고리, 창호지, 초, 신발 등을 부조했다. 이것을 '거상옷'이라고 불렀다.

[특수복]

겨울이 되면 화성 지역 어촌에서는 굴을 채취했다. 또 제부도, 우음도, 어도, 형도에서는 갯벌 위로 드러난 '감길'을 통해서 육지로 나온다. 고무장화가 나오기 전 겨울갯벌을 걷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차가운 바닷물과 겨울바람에 발이 시리고, 때로는 성에가 발을 찌르기도 했다. 그래서 겨울철 갯벌에서는 감발을 하거나 허트매를 신어야했다. 감발은 짚을 부드럽게 빻아서 부드럽게 만들어 발가락을 감싸고 그 위로 양말이나 버선을 신는 것을 말한다. 짚신을 신으면 갯벌에서 벗겨지기 때문에 새끼줄로 엄지발가락부터 시작해서 발을 꽁꽁 감싸야한다. 또는 허트매를 신었는데, 허트매는 짚신과 모양이 같으나 발목 뒷부분에 줄이 있고 발등 부분에 고리가 있어서 발에 고정시킬 수 있었다. 갯벌에 들어갈 때는 허트매를 신고 발목부터 무릎까지도 짚으로 감싼다. 이렇게 감발이나 허트매를 신고 갯벌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물이 차갑지만 곧 훈훈해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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