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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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應河將軍-情話 |
영어공식명칭 | Gen. Kim Eung-ha's Love Stor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명환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74년 - 「김응하 장군의 정화」 강원일보사에서 발행한 『태백의 설화』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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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77년 - 「김응하 장군의 정화」 문화재보호협회 철원군지부에서 발행한 『향토지-철원, 김화, 평강』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김응하 장군의 정화」 철원군에서 발행한 『철원군지』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5년 - 「김응하 장군의 정화」 강원도·철원군에서 발행한 『철원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0년 - 「김응하 장군의 정화」 철원문화원에서 발행한 『철원향토지』 4권에 수록 |
관련 지명 | 하갈리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 |
성격 | 역사 인물담 |
주요 등장 인물 | 김응하|김제남의 손녀 |
모티프 유형 | 도적을 물리친 천하장사 |
[정의]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 출신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 무신인 김응하의 용맹함과 혼인 과정을 담은 이야기.
[개설]
「김응하 장군의 정화」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 출신이자 조선 후기 무신인 김응하(金應河)[1580~1619] 장군의 용맹함과 혼인 과정에 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김응하 장군의 정화」는 1974년 강원일보사에서 발행한 『태백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문화재보호협회 철원군지부에서 1977년에 발행한 『향토지-철원, 김화, 평강』, 철원군에서 1992년에 발행한 『철원군지』, 1995년에 강원도·철원군에서 발행한 『철원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철원문화원에서 2000년에 발행한 『철원향토지』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
김응하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의 일이다. 김응하가 스물네 살쯤 되었을 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사냥을 나가서 철퇴로 곰 한 마리와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 곰에서 웅담을 꺼내고 표범 가죽을 벗겨 짊어지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한 나무꾼을 만났다. “여보, 젊은 양반, 이 고개를 넘어가면 무서운 땡초 소굴이 있소. 그놈들은 먼저 사람들을 죽여 놓고 나서 물건을 빼앗는 잔인한 놈들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시오.”라고 일러 주었다. 나무꾼이 땡초라고 한 무리는 죄를 짓고 도망친 사람들이 산중에 모여 사찰 등을 점령한 뒤 낮이면 동냥을 다니고 밤이면 도적질을 하는 무리이다.
나무꾼에게 이야기를 들은 김응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날이 저물어 마을의 한 기와집 문 앞에 서서 하룻밤 묵기를 청하였다. 집주인은 “오늘 밤 우리 집에 도둑 떼가 오게 되어 있소. 만일 낯선 사람이 눈에 띄었다가는 당장 참화를 당할 터이니 다른 집으로 가 보시오.”라며 거절을 하였다. 김응하는 “도둑떼가 온다고요? 내가 막아 드릴 터이니 저녁밥이나 먹여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산에서 잡은 표범의 가죽과 웅담을 보여 주며 “이것도 모두 내가 잡은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집주인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응하가 이번에는 마당가에 있는 반 아름이나 되는 배나무를 두 손으로 잡고 뿌리째 뽑아 옆에 있던 바위를 후려갈기니 배나무가 동강이 나 버렸다. 집주인은 그제야 김응하가 천하장사임을 알고 사랑방으로 맞아들였다.
집주인은 원래 경기도 가평 사람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피난을 왔다가 눌러살게 되었다. 그리고 조카딸이 한 명 있는데, 한양에 있는 재상 집안의 딸이며, 요양하기 위하여 잠시 시골에 와 있었다. 그런데 미모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서 땡초의 두목인 마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마달이 조카딸을 셋째 첩(妾)으로 달라고 하여, 한 달 전에 조카딸이 데려온 몸종을 조카딸로 꾸며 마달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마달이 눈치를 채고 오늘 밤 진짜 신부를 곱게 단장시켜 신방을 차려 놓고 기다리지 않으면 집안 식구를 모두 죽여 분풀이를 하겠다고 하였다. 집주인에게 사연을 들은 김응하는 자기가 대신 신부 노릇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깔아 놓은 이불 위에 누웠다. 잠시 뒤 대문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마달이 방으로 들어왔다. 마달은 김응하가 신부인 줄 알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김응하가 마달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올려쳤다. 그리고 이를 보고 달려온 패거리들까지 모두 때려눕혔다. 그사이에 마달은 몰래 도망쳤다.
다음 날 김응하가 집주인에게 작별을 고하자, 집주인이 김응하를 붙잡았다. “도망간 마달이 원수를 갚으러 올 터인데 지금 떠난다면 우리 집은 아주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오.”라며 집에 더 머무르기를 청하였다. 이에 김응하는 도적의 소굴인 화엄사(華嚴寺)에 직접 쳐들어가 잡혀간 몸종도 찾고, 화엄사의 중들도 구하여 주기로 작정하였다. 김응하가 뒷산을 넘어 화엄사에 도착하니 때는 거의 한밤중이었다. 마달과 패거리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김응하는 호통 소리와 함께 철퇴를 휘두르며 도적들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흩어져서 자던 패거리들이 제각기 낫과 도끼, 창과 몽둥이를 들고 쫓아 나와 김응하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김응하가 펄쩍 뛰어 몸을 솟구쳤다가 내려오면서 발길로 두 놈을 차니 ‘쿵’ 하고 마당 가운데로 나가떨어졌다. 이 광경을 본 패거리들은 그만 겁에 질려 달려들지 못하였다. 김응하는 순식간에 마달 패거리들을 때려눕혔다.
다음 날 김응하가 다시 집주인에게 하직을 고하자, 집주인이 장군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인도하여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였다. 자신은 한씨(韓氏)로 일찍이 과거를 보아서 양주군수를 지냈고, 조카딸은 인목대비(仁穆大妃)[1584~1632]의 부친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1562~1613]의 손녀라는 것이다. 이이첨(李爾瞻)[1560~1623] 등이 역적으로 모는 바람에 집안이 멸족될 위기에 처하자 조카딸이 몸종 한 명만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피신을 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카딸을 위험에서 구하여 주었으니 혼례를 한 후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김응하는 사양하였으나 집주인은 끝내 듣지 않고 혼인식을 올리게 한 후 김응하를 신방으로 들여보냈다. 신방으로 들어간 김응하는 눈을 들어 단정히 앉은 신부를 보았다. 비록 열여섯 살이라고 하지만 의젓하고 단아하여 예법 있는 양반의 규수가 분명하였다. 김응하는 “당신은 한양 재상집에서 금지옥엽같이 자라난 귀한 몸이요. 나는 시골의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오늘 이와 같이 부부의 연분을 맺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맞지 않을 것 같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신부는 “도적에게 죽게 된 몸을 구하여 주신 은혜를 생각하오면 일생을 두고 갚을지라도 다 갚지 못할까 하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신방을 한씨 집에서 보낸 김응하는 나흘째 되던 날 신부와 몸종을 데리고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웅담과 표범 가죽을 판 돈으로 집 세 칸을 장만하여 동생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김응하 장군의 정화」는 ‘도적을 물리친 천하장사’를 기본 모티프로 하고 있다. 무과에 급제하기 전 김응하의 무용담이며, 김응하가 광해군 때의 문신인 김제남의 손녀사위가 된 내력에 대하여서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