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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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啓河 |
영어공식명칭 | Ko Kyeha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원희 |
출생 시기/일시 | 1856년 - 고계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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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0년~1923년 - 고계하 해동은행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4월 - 고계하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8년 - 철원읍민들이 고계하 송덕비 건립 |
출생지 | 월하리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 |
활동지 | 서울 - 서울특별시 |
묘소 | 관우리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해동은행 두취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 출신의 자산가.
[개설]
철원 출신으로 해동은행 두취를 지냈으며 고계학원을 설립한 갑부이다.
[활동 사항]
고계하(高啓河)[1856~1926]는 1856년 지금의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12월의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고계하는 강원도의 최고 갑부였는데, 흔히 일제 강점기 강원도 제일의 갑부라고 알고 있는 강릉 선교장의 주인 이근우의 당시 재산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고계하는 소작농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며 재산을 축적하여 사람들이 “철원 돼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계하는 해동은행의 두취(頭取)[예전에, 은행장을 이르던 말]를 지냈는데, 해동은행은 1920년 1월 자본금 200만 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6월에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설립되었다. 초대 두취에 윤덕영이 선출되었지만 7월에 중역 대부분이 사임하여 고계하가 두취로 취임하였다. 고계하는 1923년 동경 대지진 발생 당시 110원의 구호금을 내기도 하였다.
고계하는 생존 당시 넷째 아들로부터 토지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고, 1926년 4월 사망한 후에는 친족들 사이에 재산을 둘러싼 소송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였다.
[묘소]
고계하의 묘소는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고계하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송덕비는 1928년 6월에 건립되었는데, 1919년 철원읍 도로 정비 시 고계하가 거액을 기부하여 철원 읍민들이 세웠다. 원래 철원 읍내에 있던 것을 묘소 입구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