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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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梵日國師 |
이칭/별칭 | 통효대사(通曉大師),연휘(延徽),김품일(金品日)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홍승우 |
[정의]
남북국 시대 사굴산문을 열고 철원 지역에 사찰을 건립한 신라 승려.
[가계]
범일(梵日)[810~889]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속명은 김품일(金品日)이다. 아버지는 명주도독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는 명주[현 강원도 강릉시] 일대 유력 가문 출신인 문씨(文氏)이다. 『조당집(祖堂集)』에 어머니의 성이 지씨(支氏)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支)는 문(文)과 자형이 비슷하여 발생한 오자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범일의 계통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한다. 원성왕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후 명주로 퇴거한 김주원(金周元)을 범일의 가계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이와 정반대로 중앙에서 파견된 진골 귀족 가문으로 보기도 한다.
[활동 사항]
범일은 810년(헌덕왕 2) 1월 10일 명주에서 태어났다. 1824년 15세 때 출가하였고, 829년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다. 처음에는 의상(義湘) 계통의 화엄학(華嚴學)을 익혔던 것으로 보이나, 831년 신라의 사은사(謝恩使) 일행에 합류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간 뒤 남종선(南宗禪)을 접하고 선승(禪僧)이 되었다. 염관(鹽官) 제안대사(濟安大師)를 스승으로 섬기며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조사선(祖師禪)을 전수받았고, 동시에 석두희천(石頭希遷) 계통의 약산유엄(藥山惟儼)을 방문하여 선법을 전수받았다.
844년 도교를 숭상하던 당 무종(武宗)이 불교계를 탄압하자 범일은 반 년 동안 상산(商山)에 은거하다가 소주(韶州)에서 중국 선종 제6조 혜능(慧能)의 탑에 참배하였으며, 2년 뒤인 846년 신라에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목표를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신라로 돌아온 후에는 851년까지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坐禪)하였다.
범일은 851년 명주도독의 청으로 명주 굴산사(崛山寺)에 머물며 사굴산파(闍崛山門)을 세웠고, 4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며 강원도 곳곳에 사찰을 세웠다.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세운 흥림사(興林寺)[훗날 심원사(深源寺)로 개칭]를 859년에 중건하고 천불을 만들어 봉안하였으며, 이듬해 흥림사에 성주암(聖住庵)·지장암(地藏庵)·남암(南庵)을 세웠다. 863년에는 흥림사 인근에 안양사(安養寺)를 창건하였다. 범일은 889년(진성여왕 3) 5월 굴산사에서 사망하였다.
사굴산문은 신라 하대에 성주산문(聖住山門)에 비견될 만큼 번성하였다. 이에 871년 경문왕과 880년 헌강왕이 범일을 국사(國師)로 삼아 중앙에 데려가려고 하였으나, 범일은 두 왕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범일 생전에 사굴산문은 강원도 일대의 유력 호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중앙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고, 유명한 고승인 행적(行寂)과 개청(開淸)을 배출하였다.
[사상과 저술]
범일은 도가 일상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주장하였다. 또한 깨달음은 문자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여 자신의 몸으로 체험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상훈과 추모]
범일은 사망한 뒤 통효대사(通曉大師)라는 시호와 연휘(延徽)라는 탑호를 하사받았다. 강릉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범일을 대관령성황신으로 모셔 왔으며,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숭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