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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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昌齡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Bakchangryeong Memorial Ston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714-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원미경 |
건립 시기/일시 | 1921년 - 박창령 신도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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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377년 - 박창령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449년 - 박창령 사망 |
현 소재지 | 박창령 신도비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714-1 |
원소재지 | 박창령 신도비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714-1 |
성격 | 비 |
양식 | 비좌개석(碑座蓋石) |
재질 | 화강암[개석]|오석(烏石)[비신]|화강암[대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80㎝[높이]|61㎝[폭]|24㎝[두께] |
소유자 | 영해박씨 후손 |
관리자 | 영해박씨 후손 |
[정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박창령의 신도비.
[개설]
박창령(朴昌齡)[1377~144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字)는 원길(元吉)이다. 아버지는 전객령(典客令) 박유(朴瑈)이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서(郞署)에 임명되었다. 영흥소윤(永興少尹)이었을 때 선원전(璿源殿)을 세웠다. 이후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냈으며, 사망한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박창령의 아들 박도(朴渡), 박제(朴濟), 그리고 손자 박규손(朴奎孫)·박효손(朴孝孫)·박천손(朴千孫)·박인손(朴璘孫)·박계손(朴季孫) 등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정재(靜齋) 조상치(曺尙治)와 함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김화현(金化縣) 남면(南面) 육단리(六丹里) 어둔산(於屯山)에 초막을 짓고 은둔하며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훗날 이들 아홉 명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사곡리에 구은사(九隱祠)가 세워졌다.
[건립 경위]
박창령 신도비(朴昌齡神道碑)는 이우명(李愚明)이 글을 짓고 조동윤(趙東潤)이 글씨를 썼으며, 유한춘(劉漢春)이 전자(篆字)를 써서 1921년에 건립되었다.
[위치]
박창령 신도비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714-1에 있다. 국도 제56호와 국도 제5호 그리고 국도 제47호가 만나는 근남면 사곡리 삼거리에 있다.
[형태]
박창령 신도비는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이 씌어진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이고 개석은 팔작지붕이며 대석은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높이는 180㎝이고 폭은 61㎝, 두께 24㎝이다. 박창령 신도비의 개석은 화강암, 비신은 오석(烏石), 대석은 화강암 재질이다.
[금석문]
박창령 신도비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박공 신도비명 벽진 이우명 찬, 풍양 조동윤 서, 강릉 유한춘 전(嘉善大夫吏曹參判朴公神道碑銘 碧珍李愚明撰, 豐壤趙東潤書, 江陵劉漢春篆)”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1921년에 건립된 구비(舊碑)는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나 개석과 비신이 파손되어 여섯 조각으로 흩어져 있던 것을 다시 붙여서 세웠다. 구비 옆에 후손들이 새로 신도비를 세웠다.
[의의와 평가]
박창령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던 구은사 칠의사(七義士)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며, 박창령 신도비는 오랫동안 사곡리 일대에 세거한 영해박씨 문중의 큰 어른인 박창령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