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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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冬溫洞傷痍軍人村建立 |
영어공식명칭 | Construction of Disabled Veteran Village in Dongon-dong |
이칭/별칭 | 고잔벌,고잔평,드르니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규 |
[정의]
1955년 11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 조성된 난민 정착촌.
[개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 있는 동온동(冬溫洞)마을은 고잔벌, 고잔평, 드르니라고도 불리어 왔다. 6·25전쟁 전에는 거의 아무도 살지 않았고, 수복 이후 실향민과 제대군인, 상이용사들이 정착하면서 새로운 마을이 들어섰다. 동온동은 한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적 배경]
1955년 11월 철원에 ‘제대장병보도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6·25전쟁 이후 생활고를 겪던 제대장병보도회 회원들은 여러 모로 궁리한 끝에 개간할 황무지를 찾아나섰다. 이들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동온동 일대 200여 정보[약 1.983㎢]에 이르는 황무지를 발견한 뒤 철원군 당국에 양해를 구하고 거처를 정하였다. 60여 세대 368명[모두 제대 장병]이 천막에 토굴을 파고 새 살림을 시작한 것이다.
[경과]
농기구와 종곡 등 농사에 필요한 재료가 없었던 동온동마을 개척자들은 서울의 케어(CARE) 본부 책임자인 그라함 프렌취를 찾아가 원조를 요청하였다. 1956년 5월 그라함 프렌취는 동온동에 직접 찾아와 현장을 확인하고는 동온동마을 개척자들이 요청한 것을 원조하여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라함 프렌취는 우선 농기구와 종곡[고구마·콩·녹두·팥·수수동부 등]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1956년 10월에 집 100동 분 건축자재[재목·못·시멘트]를 보내 주었다. 동온동마을에 대한 원조와 협조는 약 1년 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첫해에 개간한 땅이 100정보였고, 첫가을 수확량이 6가지 잡곡 500여 가마였다. 1957년에는 130여 정보를 개간하고 700가마의 잡곡을 수확하였으며, 1958년에는 150정보를 개간하고 1,200여 가마를 수확하였다.
[결과]
황무지를 개간한 토지가 확장되고 수확이 증가함으로써 동온동 주민들의 생활 형편도 개선되었다. 천막의 움집은 잘 설계된 개량 농가주택 200동으로 변모하였다. 인구도 360여 명에서 518명으로 늘었다. 그라함 프렌취는 농사 짓는 데 도움이 되는 소 15마리를 동온동마을에 선물로 보내 주었다. 마을 주민들은 동온동을 ‘철원난민정착사업장’이라고 이름 짓고 선거하여 이장을 뽑았다. 황무지를 개간한 지 3년 만에 40명에 이르는 아동들을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보낼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온동마을은 6·25전쟁이 끝난 후 수복 지구 철원에 외국 원조로 지어진 실향민과 난민 정착촌의 첫 사례이다. 현재는 강원도 철원군 제일의 옥토가 되었고, 갈말읍에서 농가 소득이 높은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