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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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阿志泰事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 |
집필자 | 이재범 |
[정의]
913년에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청주 사람 아지태와 관련하여 발생한 태봉의 정치적 사건.
[개설]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을 신경으로 선포하면서 청주에서 1,000호를 이주시켰다. 아지태는 당시 이주한 청주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지태에 관하여서는 아지태 사건과 관련된 기록 이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궁예의 멸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태봉의 정치적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고려사』에는 아지태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경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청주인 아지태는 본래 아첨하고 간사하더니 궁예가 참소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같은 주인(州人)인 입전(笠全)·신방(辛方)·관서(寬舒) 등을 참소하였다. 유사가 이를 국문하여 여러 해 동안 해결하지 못하였는데, 태조가 바로 진위를 가려내어 아지태가 엎드려 허물을 자백하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칭찬하고 기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문(轅門)의 장교, 종실의 훈현(勳賢), 지계있는 유아(儒雅)의 무리가 바람처럼 따랐다. 태조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곤외(閫外)로 나가기를 구하였다.”[『고려사』권1, 태조세가 건화 3년)]
[경과]
『고려사(高麗史)』의 관련 내용은 청주인 사민(徙民)이 실시된 지 9년 뒤인 913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은 간사한 청주인 아지태와 얽힌 사건을 고려 태조가 잘 해결하여 태봉의 신망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아지태 사건에 관하여서는 『고려사』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여러 해석들이 있다. 궁예와 왕건의 세력 대립이 표면화한 것이고, 아지태는 궁예, 입전·신방·관서 등은 왕건의 지지세력이며, 왕건 측의 승리로 끝난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아지태 사건을 904년에 철원으로 이주해 온 청주인들의 내부 갈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궁예의 신임이 두터운 아지태의 세력을 제거한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철원에 온 청주인들이 아지태파와 입전·신방·관서 등으로 나뉘었는데, 궁예를 겁내어 다른 관리들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왕건이 해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건이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 등이 있다.
[결과]
아지태 사건 이후로 『고려사』의 기록은 궁예가 황음무도하고 관심법으로 사람을 마구 죽이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일삼는 내용만 수록되어 있다. 왕건은 아지태 사건으로 태봉의 원훈장교, 종실훈현, 지계유아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었다. 아지태 사건은 궁극적으로 태봉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의의와 평가]
아지태 사건은 궁예 정권을 몰락에 이르게 한 중대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아직은 여러 연구자들의 의견만이 제시되어 있는 상태이다. 철원을 도읍으로 하였던 태봉에 있어서 최대의 정치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