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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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麟趾 |
영어공식명칭 | Jeong Inji |
이칭/별칭 | 백저(伯雎),학역재(學易齋),문성(文成),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전기 부여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익(鄭翊)이고, 할아버지는 정을귀(鄭乙貴)이다. 아버지는 정흥인(鄭興仁)이고,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은 조후(趙侯)의 딸 한양 조씨(漢陽 趙氏)이고, 두 번째 부인은 이휴(李携)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아들은 정현조(鄭顯祖)·정경조(鄭敬祖)이고, 동생은 정인종(鄭麟踵)·정인각(鄭麟角)이다.
[활동 사항]
정인지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14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예빈시주부·병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이조정랑·예조정랑·집현전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에는 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으며,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한 뒤 집현전직제학에 제수되었다. 1428년 집현전부제학과 경연시강관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다른 관직에 제수되더라도 계속 집현전 관직을 겸하였다.
정인지는 1430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總制), 1433년 인수부윤(人壽府尹), 1434년 이조좌참판을 거쳐 1435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충청도관찰사는 정인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당시 부여에 머물고 있던 아버지 정흥인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1440년 형조판서와 지중추원사를 지냈고,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의정부우참찬으로서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임하였다. 이후 이조판서와 예조판서, 공조판서,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정인지는 1450년(문종 즉위년) 의정부좌참찬과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판중추원사로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고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봉되고 영의정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를 마무리하고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학문과 저술]
정인지의 저술로는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다. 『고려사(高麗史)』를 개찬하였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사륜요집(絲綸要集)』,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 증수에 참여하였고,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을 총감수(總監修)하였다.
[묘소]
정인지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로1길 24[외령리 321-3]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