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511
한자 扶餘 砂宅智積碑
영어공식명칭 Sataekjijeokbi
이칭/별칭 당탑 건립 기념비,사택지적당탑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박중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12월 31일연표보기 - 부여 사택지적비 보물 제1845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사택지적비 보물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국립부여박물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지도보기
원소재지 사택지적비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사택지적
재질 사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06㎝[높이]|38㎝[너비]|29㎝[두께]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 시대 사택지적이 세운 기념비.

[개설]

부여 사택지적비(扶餘 砂宅智積碑)는 백제 시대 사택지적(砂宅智積)이라는 사람이 당(堂)과 탑(塔)을 세우면서 소회를 새겨서 세운 당탑 건립 기념비이다. ‘사택지적당탑비’라고도 부른다. 2014년 12월 31일 보물 제184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보물로 변경되었다.

[위치]

부여 사택지적비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1948년 부여읍 부소산 기슭인 관북리의 도로변에서 발견된 것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소장 중이다. 발견 장소가 관북리의 도로변이기는 하지만 부여 신궁 건립을 위하여 모아 놓은 골재더미 위에 올려진 상태였으므로 정확한 원래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다.

[형태]

부여 사택지적비는 발견 당시 석비의 한쪽 부분이 떨어져 나간 잔비(殘碑) 상태로 발견되었다. 현재 비의 높이는 106㎝, 너비는 38㎝, 두께는 29㎝ 내외이다. 사암 계통의 암석을 다듬어 비면을 만들었다. 그리고 음각으로 가로세로 줄을 새겨서 글씨를 한 자씩 새겨 넣을 수 있는 정간(井間)을 만들고 글씨를 새겼다. 글자 크기는 4.5㎝ 정도이다. 현존하는 것은 비문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로 1행에 14자가 쓰여 있어 모두 56자가 남아 있다. 비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봉황문이 새겨져 있으며 발견 당시 붉은 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금석문]

부여 사택지적비는 현존하는 백제 금석문 가운데 필체가 세련되고 문체가 유려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문의 문체는 중국 육조 시대에 유행하였던 운율을 잘 맞춘 사륙변려체이다. 남아 있는 문장 가운데 첫 부분은 비를 만들어 세운 때와 비를 만든 사택지적 자신을 소개한 글이다. 이어서 사택지적이 나이가 들어 날로 몸이 노쇠해지고 젊음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을 슬퍼하여 당탑을 세운다는 건립 배경을 적었다. 그다음에는 당과 탑의 아름다운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 이어지는데 현존 비문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일본서기』 황극 원년(642) 조에는 백제의 대좌평 신분으로 왜에 사신으로 갔던 ‘지적’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부여 사택지적비를 세운 사택지적이 기록의 ‘지적’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부여 사택지적비의자왕 대에 건립된 석비로 판단된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지적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토대로 의자왕 대에 발생한 정변을 이해하는 정치사적 자료로서도 중요하게 평가되어 왔다.

부여 사택지적비에는 석비에서 드물게 보이는 봉황문이 새겨져 있고 붉은 칠을 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 한때는 불교가 아닌 도교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석비 건립자 자신의 노쇠함을 슬퍼하여 당탑을 건립하였다고 적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염세적인 생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과 탑의 건립이 불교의 금당과 불탑 건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고 부여 사택지적비는 사비 시기 백제의 불교를 이해하는 자료로 인식되어 왔다. 다만 석비와 당탑의 건립 배경이 사후에 영혼의 안식과 구원을 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자기 구원을 중시하여 온 소승 불교 사상의 경향을 반영하는 비문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한편으로 사택지적의 이름인 ‘지적’이 불경에 등장하는 지적 보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지적 보살과 연계된 불교 경전상의 계보에 주목하여 사택지적이 법화 신앙을 지향하는 사상적 경향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부여 사택지적비는 백제 때 만들어진 석비로 유려한 사륙변려체의 문체와 함께 뛰어난 서체를 보여 준다. 백제뿐 아니라 삼국 시대 금석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문체와 서체를 보여 주는 명문 자료이다. 또한 백제 말기의 정치 상황과 백제 불교의 사상적 경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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