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454
한자 近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Tim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6년 - 강화도조약 체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4년 - 이규호 동학사상 수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 동학농민운동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1895년 - 청일전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 - 지방제도 개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 러일전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5년 - 을사조약 체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 국채보상운동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온양온천주식회사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1945년 - 일제강점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4월 - 3·1운동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현충사 중건 운동 전개

[정의]

개항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역사.

[서원 철폐와 천주교 박해]

1863년(철종 14) 고종이 즉위한 뒤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서구 열강의 침략 가능성이 높아지던 상황에서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였다. 양반 유생층의 지역적 기반인 서원 철폐가 대표적이었다. 이로 인해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도 도산서원(道山書院), 인산서원(仁山書院), 정퇴서원(靜退書院) 등이 훼철(毁撤)되었다.

또한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를 이어갔다. 아산의 경우 신창 남방재 등에 거주하던 천주교도가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박해가 계속되자 천주교도들은 살기 위해 산간 골짜기로 피신하면서 소규모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하였다. 교우촌은 송악면의 강쟁이[강장리], 명지게미[수곡리], 머리서리[수곡리], 절골[강당리], 지풍골[유곡리] 등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개항과 지방제도 개편]

1876년(고종 13) 개항은 아산 지역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내륙 무역을 통해 이익을 획득하고자 일본과 청나라가 경쟁하는 가운데 둔포, 신창, 선장 등 바닷길과 맞닿은 곳에서 쌀을 가져가고 면직물, 석유 등을 싣고 오는 상업적 교역이 활발해졌다. 또한 정부에서는 1895년(고종 32)부터 지방제도 개편을 시작하여 1906년(고종 43) 온양, 신창, 아산 등 3개 군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지역이 편입되기도 하였다. 무역을 통한 상품경제구조 편입과 행정구역 재편성은 오랫동안 독자적 생활권을 유지하던 지역 주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척사위정과 문명개화]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척사위정(斥邪衛正)과 문명개화(文明開化)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지역 차원으로 점차 확산되었고, 아산에서는 이와 같은 흐름을 대표하는 여러 가문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척사위정의 경우 이성렬(李聖烈)·이정렬(李貞烈) 등이 활약한 예안이씨(禮安李氏) 외암(巍巖) 이간(李柬)의 후손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후예인 덕수이씨(德水李氏)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문명개화는 수원으로부터 이주한 뒤 둔포에 자리를 잡고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이룬 윤웅렬(尹雄烈)·윤영렬(尹英烈)·윤치호(尹致昊) 등의 해평윤씨(海平尹氏)가 대표적이다.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근대 시기 아산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가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동학농민운동이었다. 청나라 군대는 1894년 5월 아산만을 통해 아산에 주둔하게 되면서 각종 군수물자를 요구하였고, 이는 지역민에게 부담으로 돌아갔다. 또한 점차 북상하면서 치러진 전투과정에서도 인근 지역민들의 피해가 컸다.

아산에도 1880년대부터 동학교도들이 생겨났다. 1884년(고종 21) 온양에 살던 이규호(李圭鎬)가 동학사상을 수용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점차 조직을 갖추었고, 안교선(安敎善)·이신교(李信敎)·정태영(丁泰榮)·김경삼(金敬三) 등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당시부터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화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관군·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였다.

[국권회복운동과 일제강점]

1904년(고종 41) 러일전쟁 개시 이후 일본은 본격적인 강점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아산에서는 온양온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의 토지 침탈이 전개되었다. 일본인 아미토 도쿠야[網戶得哉]가 온천 개발권을 차지하였고, 1905년(고종 42) 6월부터 설비를 완료해 온천 영업을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의 온양행궁이 일본인 개발업자의 손에 넘어갔으며, 1909년(순종 3)에는 온양온천주식회사(溫陽溫泉株式會社)가 설립되었다.

아산 지역에서도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홍주의병(洪州義兵)에 성재한(成載翰), 곽한일(郭漢一) 등이 참여하였고, 아산·온양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의병 부대가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애국계몽운동은 학교설립운동과 1907년(순종 원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학교설립은 사립학교와 야학 등이 주도가 되어 진행되었다. 사립학교로는 희성학교, 보성학교, 일신소학교, 문지사숙, 명륜학교, 신민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학이 활발하게 운영되었으며, 사립학교나 야학 외에도 개량 서당이나 의숙(義塾)·사숙(私塾)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기관이 존재하였다. 또한 안봉삼(安鳳三)의 아내와 양성환(梁性煥)의 딸 양소사(梁召史) 등 여성을 필두로 보통 사람들이 국채보상금을 납부하며 국권 수호를 위해 힘썼다. 그러나 국권회복운동은 국권을 수호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1910년(순종 4) 조선은 일제에 강점되었다.

[3·1운동과 현충사 중건 운동]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는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도 온양의 유흥 도시화, 식민지 농업정책 전방위적 시행, 군국주의의 확대와 함께 물질적·정신적 억압이 동시에 나타났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3~4월 아산 각지에서도 만세 시위, 횃불 시위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4일 선장면 군덕리에서는 4·4 아산 독립 만세 운동으로도 불리는 아산 지역 3·1운동 가운데 가장 큰 시위가 일어났다. 1920년대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아산지방부, 형평사(衡平社) 아산지사, 재만동포옹호동맹 등이 지역 내에서 조직되면서 민족운동·사회운동을 발전시킬 토대를 형성하였다. 1930년대에는 아산농민조합을 건설하여 농민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1931년에는 독립운동을 후원하느라고 어려워진 이순신 종가의 위토(位土)를 지키고, 현충사 재건을 추진한 이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이 전국적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천도교단의 조직적 움직임 아래 일제 패망을 염원하는 기도문 보급 운동인 멸왜기도운동(滅倭祈禱運動)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처럼 아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일제 패망 시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의의 및 평가]

개항 전후로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아산 지역에서는 외세에 의한 상품경제구조 편입과 행정구역 재편성 등을 통한 생활의 변화가 나타났다. 아산 지역민들은 시각차에 따라 동학농민운동, 항일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3·1운동 등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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