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온천문화를 간직한 온양온천과 온양행궁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399
한자 韓國最高-溫泉文化-溫陽溫泉-溫陽行宮
이칭/별칭 온양온천과 온양행궁(溫陽溫泉-溫陽行宮)
분야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집필자 김일환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며, 온양행궁의 내력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온천 문화를 간직한 온양온천 이야기.

[온양온천의 역사]

온양온천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36년(18)에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는 기록에서 비롯된다. ‘탕정(湯井)’은 끓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란 뜻으로, 온양온천을 지칭한다. 역대 국왕들의 온양 방문은 삼국통일 후 712년(성덕왕 11) 4월에 왕이 온수(溫水), 곧 온양에 행행(行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 때 탕정군은 고려시대의 기록이어서 온수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문종온양온천을 찾아와 목욕하였다. 1082년(문종 36) 9월에 문종은 남방을 순수한다는 목적으로 개성을 출발하여 온수군에 도착한 뒤 15일간 머물며 온천욕을 하였다. 이 기간에 문종은 신하들과 시 문답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문종이 떠날 때는 재상들이 글을 올려 국왕의 온양온천 행차를 축하하였다. 문종은 행행하면서 주변의 역로, 역참에 그해 조세의 절반을 면제해 주어 왕의 덕화(德化)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문종온양온천행은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이 탕치(湯治)와 민정 시찰을 목적으로 온행하던 사례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처럼 온양은 기원 전후부터 온천지로 알려졌고,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여러 국왕이 온천욕을 목적으로 찾아온 오랜 역사를 가진 온천지였다.

[조선시대 온궁의 건립과 변천]

조선시대 왕실이나 병든 일반 백성들이 가장 선호하던 온천은 충청도의 온양과 황해의 평주였다. 온양은 세종이 온양행궁을 짓고 세 차례나 방문하면서 새로운 왕실 온천지로 자리 잡았다. 조선조에 온양온천을 처음 찾아온 국왕은 태조였다. 1396년(태조 5) 3월 10일 태조는 서울을 떠나 직산을 거쳐 3월 16일 온양에 도착하였다. 이후 보름간 온양에서 머물다 4월 1일 천안을 지나 광주를 거쳐 4월 7일에 귀경하였다. 이때 국왕이 머무는 임시 거처로 행궁을 지었는데, 1396년 3월에 승려들을 시켜 원(院) 집에 숙소를 지은 것이 온양에 온천행궁이 지어진 시작이다.

본격적으로 온천행궁, 곧 온궁(溫宮)이 축조된 것은 세종 대였다. 세종이 온양으로 행행(行幸)한 것은 온양온천이 민간에 가장 효험이 좋은 온천으로 유명하였고, 온양 출신인 맹사성의 권유도 주효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지병인 풍질을 치료하기 위해 1432년(세종 14) 9월에 온행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국왕의 온천행은 백성에 대한 부담이 큰 행사인데, 숙소와 목욕 시설이 있는 온궁의 축조가 가장 큰 문제였다. 세종은 민폐를 줄이기 위해 온궁을 화려하거나 크게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온궁의 체제를 그림으로 올리게 하여 자신이 직접 보고 그 수효를 감하였다. 온궁이 완성된 것은 1433년(세종 15) 1월이었다. 당시 온궁은 온양현의 관아에서 서쪽으로 7리[약 2.8㎞] 떨어진 언한동(言閑洞)에 있었다. 온궁의 규모는 25칸이며, 그 구조는 정무 공간인 정청(正廳)과 동, 서 양쪽에 두 개의 침실이 있었다. 목욕 시설인 탕실은 두 개가 있어, 남북으로 상탕자(上湯子)와 그 아래 차탕자(次湯子)가 있었다. 상탕자는 후대에 북탕(北湯)으로 지칭된 목욕 시설로 왕대비, 대비, 왕비 등 여성 전용 공간이므로 아름다운 돌로 장식한 화려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차탕자는 국왕이 목욕하던 공간으로 후대에 남탕(南湯)으로 불린다. 건물 주변에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부속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세종의 1차 온행이 끝나고 온궁의 구조는 변경되었다. 국왕이 온행하지 않을 때 백성들이 온천을 이용할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다. 세종은 왕실의 전용 공간인 정청, 침실, 북탕자는 자신이 환궁한 후 봉쇄하지만, 여타 시설은 백성들에게 개방하였다. 차탕자는 사족남녀에게 개방하고 남북의 빈 땅에는 새로운 탕자와 집을 지었다. 월대(月臺) 아래 온수가 용출하는 곳에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일반 백성 남녀가 모두 목욕하게 하였다. 왕실, 사대부, 일반 백성들의 공간으로 나뉘어 3탕으로 구성된 탕실 구조는 후대까지 계승되어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세조 대에는 온궁을 관리하는 수직인 3호를 두었다. 이들에게는 한전(閑田)으로 각각 1결 50부를 주고 관리 의무를 주는 등 온양온천의 관리 체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환관과 선공감 관리를 보내 온정(溫井)을 보수하였다. 1483년(성종 14)에는 어실 외에 휴식 공간인 헐식소(歇息所)와 세자궁 침실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것을 통해 온궁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짐작게 한다. 이후에도 후궁이나 사대부 관료들의 온양온천행은 활발하게 이어졌다. 왕실의 온행은 1483년에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가 온궁을 다녀간 것을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 1665년(현종 6)까지 182년 동안 끊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국왕이 행행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대군, 왕자, 부마, 사대부 관료층 등과 일반 백성 가운데 질환자들은 여전히 온양온천을 찾아 질병 치료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점차 국왕의 행행이 중단되자 온궁도 쇠퇴하였다. 이런 상황을 촉진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5년 후 1597년에 재발한 정유재란 때 전라도를 통해 북상한 왜군이 충청남도 공주와 아산을 지나 서울을 향해 가던 중에 온양을 급습하였다. 이 와중에 온양은 초토화되었고 온궁도 불타버렸다. 이후 온궁은 장기간 복구되지 못하고 폐허가 된 채 병자들만 찾아와 목욕할 정도로 방치되었다.

당시 온양온천의 피폐상을 보여 주는 자료가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32세이던 1660년(현종 1)에 기록한 「온양온천북탕기(溫陽溫泉北湯記)」이다. 남구만은 두풍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모친을 치료하려고 온양온천에 왔다. 그는 온양에 도착하여 당시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온궁의 모습을 목격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남구만이 온양을 찾은 때는 1660년 8월 22일이었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임진왜란 때 파괴된 온궁이 복구되지 않아 담장이 무너지고 섬돌이 망가져 성한 곳이 없었다. 궁전도 무너졌으며, 임원준이 기록한 신정비만 글자의 획이 닳고 마멸된 채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온천탕 위에 있던 단청 누각도 1620년(광해군 12)에 퇴락하여 무너져 버렸다. 이렇게 임진왜란 후 온궁은 무너지고 온천수는 오염되는 등 피폐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온궁의 구조와 온행]

온궁이 다시 복원된 시기는 현종 초였다. 현종은 지병인 습창과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1665년(현종 6)부터 모두 다섯 차례나 온양온천을 찾았다. 온양행행(溫陽行幸)의 약자인 ‘온행’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쓰인 것도 현종 대부터이다. 현종이 신병 치료를 위해 온양행을 결정한 것은 온양에 옛 행궁의 유지(遺址)가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현종은 온궁 복구에 착수하였다. 옛 행궁 터에 신축하는 온궁은 민폐 우려가 컸기 때문에 소박하게 지었다. 온궁 구조는 서쪽에 어실(御室) 6칸 8작과 온정실(溫井室), 곧 탕실은 8칸을 짓고 부속 건물은 모두 초가로 하여 전체가 100여 칸 정도였다. 처음에는 담장 밖에 임시로 지은 집이 150여 칸이 되었는데, 나중에 전체가 100여 칸 정도라는 것으로 보아 현종이 민폐에 대한 우려로 약간 줄인 것으로 보인다. 어실 세 군데에는 담장을 둘러 다른 공간과 구분하였다. 이 당시 행궁은 흙으로 계단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보면 초라할 정도로 검소하였다. 당시 온궁 축조를 위해 동원된 인력은 수천 명의 승군(僧軍)이었다.

한편 행궁 옆에 지은 임시 건물은 충청 각 고을에 분담 배정하였기에 각 수령이 자기 담당 지역의 백성을 토지결수에 따라 징발하여 축조하였다. 행궁의 주위는 포장(布帳)으로 둘러쌌다. 외포장은 둘레가 500보로, 도성 문을 모방하였고 대신들과 정리사(整理使)들이 머물렀다. 내포장은 둘레가 300보로, 궁성 문을 모방하였는데, 승정원, 옥당, 병조, 도총부 및 시위하는 여러 장수가 입직하였다. 그 나머지 각사들은 모두 외작문(外作門) 바깥으로 나가 자리하였다. 이때 지은 온궁은 비록 구조상 소박하지만, 정조 대 『온궁사실(溫宮事實)』에 실려, 현재 온궁의 전형으로 알고 있는 「온양별궁전도」에 그려진 온궁의 시원이 된다.

첫 온행으로 질병 치유의 효과를 크게 본 현종은 다음 해에 병든 어머니 인선대비를 모시고 가기로 결심하면서 행궁 증축을 계획하였다. 우선 인선대비가 머물 어실을 새로 건축하였다. 자전의 어실은 동쪽에 있는 옛 행궁 자리에 지었다. 또 옛터는 계단이 너무 높아 두어 개의 계단을 제거하여 땅을 평평하게 만들고, 집은 4칸으로 짓되, 칸 사이를 넓게 하여 비좁지 않게 하였다. 사용하는 재목은 서울에서 내려보냈다. 탕실도 바뀌어 북탕은 침실 북쪽의 내궁장의 바깥에 있고 옆에는 세조 대에 세운 신정비가 있었다. 이런 북탕은 백관들이 목욕하는 장소로 제공되었다. 이때부터 신하들에게도 온궁에서 목욕할 기회를 주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증축된 온궁은 규모가 커져 둘레가 1,758척[533m]이며 내정전이 16칸, 외정전이 12칸, 탕실이 12칸으로 확장되었다. 현종 5년에 6칸 8작이던 어실이 16칸의 내정전으로 변모하였고, 탕실은 8칸에서 12칸으로 확장되었다. 정무 공간인 외정전은 새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미루어 부대시설도 모두 이전보다 확장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온궁은 정전을 에워싸고 많은 건물이 들어찬 화려한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795년(정조 19)에 발간된 『온궁사실』에 수록된 「온양별궁전도」에서 완전하게 복원된 온궁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그림을 보면 온궁은 이중으로 담장을 치고 있다. 내궁장, 즉 안담의 가운데에는 국왕과 왕후의 숙소인 내정전과 왕과 신하가 국사를 논하는 외정전이 있고 옆에 목욕 시설인 탕실이 있다. 그 외 왕자방, 의대청, 내수라간, 온천 구탕, 영괴대, 신정비각, 종친부 등이 있었다. 이 내궁장과 외궁장 사이에는 왕을 보필하는 궐내 각사들이 옮겨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자리하는데, 와가, 초가로 되어 있는 여러 채의 집이 산재하여 있다.

다른 행궁에서 볼 수 없는 온궁의 가장 특징적인 시설은 탕실이다. 목욕 공간인 탕실은 온천물이 솟아 나오는 온정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각각 1칸 반의 크기인 욕실 2개가 있고, 욕실별로 온돌 1칸 반, 협실 1칸, 양방 1칸 등이 부속 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다. 온정은 옥돌로 한가운데를 빙 둘러 붙였다. 이곳에는 중국의 온천에서 볼 수 있는 거북이나 물고기, 게와 같은 동물이나 연꽃과 마름과 같은 식물을 형상화한 장식물과 완상할 만한 보옥이나 기교 있게 새긴 치장이 없다. 하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제작이 완벽하고 치밀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하며 규모가 굉장하면서도 질박하였다.

국왕이 온궁에 행행하면 훨씬 넓은 공간을 점유하였다. 국왕을 수행하여 온양에 오는 인원이 적으면 900여 명, 많으면 7,500명 정도로 대규모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많은 수행원을 지공(至公)하기 위해 충청도관찰사를 중심으로 호서 지방의 전체 수령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각각 수발할 대상 기관을 분담하였다. 이를 위해 가가(假家)라 불리는 임시 건물과 포막(布幕)이 온궁 주변에 다수 설치되어 온궁을 에워쌌다. 그래도 부족한 공간은 민간의 집을 징발하였으므로 집을 빼앗긴 백성들이 국왕의 온행 기간에 노숙하는 경우도 있었다. 온양 행궁의 최고 전성기는 현종 대부터 숙종, 영조, 장헌세자까지 4대에 걸쳐 국왕과 왕세자가 온행을 이어간 시기였다.

정조 대에 이르러 온궁에는 영괴대라는 새로운 축조물이 행궁에 들어섰다. 영괴대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1760년의 온행 중에 활쏘기를 했던 자리에 세워진 사대(射臺)이다. 장헌세자가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후 장헌세자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다. 정조가 즉위하고 부친의 신원(伸冤)을 도모하면서 온행 중에 백성들에게 보여준 장헌세자의 성덕이 칭송되었다. 정조에게 부친 장헌세자가 온양온천 행행 시 백성에게 보여준 덕화(德化)와 활터에 심은 느티나무는 부친의 성덕을 추억할 좋은 소재였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4월에 본격적으로 느티나무 보전을 위해 영괴대를 쌓고 영괴대비와 비각을 축조하여 장헌세자를 기념하게 하였다. 또한, 그 시말을 기록한 『온궁사실』을 발간하였다.

이후 국왕의 온행은 단절되고 온궁은 쇠락하였다. 하지만 조선 말기 고종 초에 간행된 『온양군지』에는 온궁에 함락당(涵樂堂)혜파정(惠波亭)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건물이 등장하였다. 함락당은 12칸이고, 혜파정은 10칸이었다. 나아가 1871년에 발간된 『온양군읍지』에는 내정전, 외정전은 이미 폐전되었고 함락당은 16칸, 혜파정은 14칸으로 더 확장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단, 탕실은 12칸으로 남아 있었다. 이 건물은 당시 집권자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건축물로, 흥선대원군의 온천 별장이었다. 당시 내·외정전이 사용이 불가할 정도로 퇴락하여 건물이 사라졌음과 함께 함락당혜파정이 온궁의 중심 건물이 되었음을 말한다.

1876년 문호개방이 되자 1904년 인천 개항장의 일본인 상인들이 온양온천의 상업적 가치를 주목하였다. 이들은 러일전쟁 중에 온양행궁이 ‘운현궁 기지’라고 하며 자신들이 매입했다고 주장하고 불량배를 동원하여 온궁을 폐쇄한 후 강제로 탈취하였다. 이들은 온양온천주식회사를 차리고 시설을 개조하여 이듬해 온양관이라는 명칭의 온천장을 개장하고 일본인 온천객을 유치하며 영업하였다. 1926년에는 일본인 소유의 경남철도주식회사가 온양관을 인수하여 근대적인 온천여관인 신정관(神井館)을 짓고 온천 유락장으로 경영하였다. 그중 혜파정은 여전히 살아남아 조선식 여관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신정관은 온양철도호텔로 바뀌었고 6·25전쟁 초기에 미군기의 폭격으로 신정관과 그 주변 일대가 파괴되었다. 혜파정이라는 조선식 여관도 함께 파괴되었다.

[온궁의 역사적 가치와 복원의 의미]

온양은 조선 초기 태조 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국왕을 비롯한 최고 권력자들이 가장 선호하던 온천지였다. 특히 온양행궁을 건립한 세종 이후에는 왕실 가족들이 탕치를 목적으로 자주 찾던 최고의 왕실 온천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사실이 역사 깊고 독특한 아산 지역의 온천 문화를 낳은 바탕이 되었다. 통상적으로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은 짧게는 8일, 길게는 57일 정도 온양에 머물렀다. 이런 이유로 국왕이 머무는 임시 거처로 행궁이 건축되었는데, 온천에 세워진 행궁을 온궁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국왕이 찾아가는 온천에 행궁을 조성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온궁이 건립되고 나서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국왕이 방문하고 일관되게 잘 유지된 곳은 온양행궁이 유일하다. 온양행궁의 건립은 조선 초 세종 대 이루어졌다. 세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건축을 감독하였다.

세종은 민폐에 대한 우려로 인해 작고 소박한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의 구조도 국왕뿐 아니라 병든 사대부와 일반 백성도 함께 이용할 수 있게 목욕 시설을 개조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다시 일본군이 재침한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면서 온양 지역을 급습하자 온궁은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온궁은 방치되었고 국왕들도 온행도 중단되었다. 조선 후기 국왕의 온천행이 재기된 것은 현종 대이다. 현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온양온천을 선택하고 5차례나 온행을 하였다. 이때 온양행궁이 복구되어 어실 6칸, 온천방 6칸을 비롯한 약 1백여 칸 규모로 온궁이 새로 지어졌다. 이후 숙종, 영조, 장헌세자까지 4대 95년간에 국왕과 왕세자의 온양온천행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아산 지역에 독특한 온천 문화를 형성하였다. 온양행궁에서 이루어진 왕들의 온천 목욕법도 특별한 의미가 있고 당시 왕들이 먹었던 음식도 아산의 소중한 문화 자원이 된다.

장헌세자의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부친인 장헌세자의 추억의 장소인 온궁에 영괴대를 설치하고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후 온궁은 많이 퇴락하였지만 1834년(순조 34)에 온양에 온 조수삼(趙秀三)의 「온정기(溫井記)」에 의하면 이 무렵까지 행궁은 건물이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1871년(고종 8)에는 국왕이 정무를 보던 정전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 무렵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혜파정이 신축되고 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904년부터 일본인들에 의해 온궁이 침탈되면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고 온궁 터에 온양관신정관이 지어지면서 온궁은 자취를 감추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온궁의 복원은 왕들이 다녀간 궁궐을 복원한다는 의미로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며, 온양온천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온천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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